[한자 이야기]<874>詩는 可以興이며 可以觀이며 可以群이며 可以怨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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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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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陽貨(양화)’ 제9장에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어째서 詩를 공부하지 않느냐’고 꾸짖고는 위와 같이 말했다.

可以興 이하 네 구는 동일한 어법이다. 興은 興起(흥기)시킴이다. 觀은 풍속의 성쇠를 보아 사태의 得失을 考見(고견)함을 뜻한다. 群은 많은 사람과 調和하되 방탕한 데로 흐르지 않음이다. 정약용은 빈객과 붕우를 善으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보았다. 怨은 정치를 諷刺(풍자)하여, 원망하되 성내지 않음이다. 정약용은 원망의 의미를 알고 원망하는 법을 알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邇는 近과 같다. 여기서는 부사다. 邇之事父, 遠之事君은 인간의 도리를 통틀어 거론한 互文(호문)이다. 事父는 가까운 일, 事君은 먼 일로 구별할 필요가 없다. 鳥獸草木之名은 萬象(만상)의 이름이다. ‘시경’에는 풀이 50종류, 나무가 52종류, 새가 36종류, 짐승이 24종류, 물고기가 14종류, 벌레가 18종 나온다고 한다.

‘季氏’에서 공자는 아들 伯魚가 시를 배우지 않은 것을 알고 ‘시경’의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을 應待(응대)할 때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꾸짖었다. 한자문화권의 지식인은 어려서부터 ‘시경’을 깊이 공부했다. 전한의 匡衡(광형)은 어릴 때부터 ‘시경’을 잘 풀이했으므로 유학자들이 ‘시경을 풀이하지 말라. 광형이 온다’고 할 정도였다. ‘시경’의 시만 아니라 시 일반의 교육은 정서 발달과 사고 훈련에 매우 중요하다. 그렇거늘 우리는 시 공부를 너무 등한시하는 것 같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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