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정주현] 붉은 여왕의 시각에서 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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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1일 15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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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여왕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가 공포정치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황이 이해가 간다. 붉은 여왕은 선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캐릭터다.
붉은 여왕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가 공포정치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정황이 이해가 간다. 붉은 여왕은 선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캐릭터다.
팀 버튼, 조니 뎁, 유명한 원작의 재구성, 그리고 화려한 캐스팅…. 지난 주말 개봉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영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 제쳐두고, 귀여운 독재자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 분)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붉은 여왕은 머리가 커서 슬픈 여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예쁘다고 생각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단지 외모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늘 혼자여야 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어차피 사랑 받지 못할 거면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곁에 두자고. 그리고 선택한다. '사랑 받는 것보다는 두려움의 존재가 되는 게 나아!'

이것이 붉은 여왕식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잘못한 사람은 무조건 목을 베어버리고 잘생긴 사람이나 예쁜 사람은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코가 유난히 크거나 우스꽝스럽게 턱살이 늘어지는 식으로 스스로를 변장한 아첨꾼들밖에 없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 침묵은 도덕이고 고자질은 미덕이다.

하얀 여왕의 연극적인 행동들은 코믹 요소인 동시에 선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치다.
하얀 여왕의 연극적인 행동들은 코믹 요소인 동시에 선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치다.

▶ 이유가 있었던 붉은 여왕의 공포 정치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그의 공포정치에는 명백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외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했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외톨이여야 했으며, 사람들을 곁에 두기 위해 공포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그의 앞에서 아첨을 하며 그를 부추겼다. 그의 행위에는 늘 원인이나 근거를 수반하는 '그래서'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역시 사랑 받는 것보다는 두려움의 존재가 되는 것이 낫군!'

그의 이런 믿음과 행동에 결정적인 촉매제가 있다면, 바로 어린 시절 가족이 가져다 준 트라우마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붉은 여왕이 동생인 하얀 여왕과 전투를 위해 만났을 때 동생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진짜 싸워야 할 필요가 있어?.' 여기에 붉은 여왕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만다.

'그 예쁜 눈으로 엄마 아빠를 속인 것처럼 날 또 속이려 드느냐!' 화를 참지 못한 붉은 여왕의 반응을 통해, 우리는 그의 부모조차도 예쁜 동생만을 편애했고 이것이 그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뿐 아니라 부모의 사랑까지도, 붉은 여왕은 빼앗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본성이 악하지 않다는 것은 그가 자기와 같은 외모를 가진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장면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몸이 자라는 케이크를 너무 많이 먹고 거인이 되어 버린 앨리스가 붉은 여왕에게 발견되었을 때 앨리스는 자신이 살던 마을에서 놀림을 받아 도망쳤다고 둘러댄다. 그러자 붉은 여왕은 즉시 명령한다. '이 아이에게 맞는 옷을 찾아주고 먹을 것을 주어라!'

히스테리컬하면서도 귀엽고 단순 무식한 것 같으면서도 정이 가는 붉은 여왕은,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하고 인상 깊은 인물이다. 동시에 선과 악의 경계가 얼마나 불분명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철학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는 맞수이자 동생인 하얀 여왕과의 대조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팀 버튼-조니 뎁 콤비가 재해석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감독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상투적 결말이 아쉽다. 사진제공 소니픽쳐스.
팀 버튼-조니 뎁 콤비가 재해석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감독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상투적 결말이 아쉽다. 사진제공 소니픽쳐스.

▶ 연극적 善, 솔직한 惡… 선과 악의 경계는?


하얀 여왕은 온통 흰색 천지인 하얀 왕국에 살고, 하얀 드레스를 입는다. 전통적으로 선(善)을 대표하는 색깔로 여겨진 하얀색 세상 속에서, 큰 눈과 부드러운 머리채를 늘어뜨린 채 산다. 그리고 청바지 모델처럼 가냘픈 허리로 종종거리며 왕궁을 걸어 다닌다.

하지만 심할 정도로 과장된 그의 연극적 행동거지를 보고 있노라면, 가식과 참모습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그에 대해 일말의 거짓도 의심치 않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지만, 과연 그것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출하는 아름다움에 현혹된 결과는 아닌지 돌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손으로는 절대 살생을 하지 않기로 맹세했다면서, 다른 누군가가 대신 손에 피를 묻혀주길 원한다. 붉은 여왕에 대적할 힘이 없어서? 아니다. 왜 그런 맹세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본인은 우아한 모습만을 지키고 악역은 남에게 떠맡기려는 것이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이런 태도는 기만적이다.

반대로 붉은 여왕은 정직하고 심플하다. 눈치 없기로는 백단이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순수해서 웃음과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악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그래서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미묘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주체적이다. 하얀 여왕이 '챔피언'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공주놀이를 하는 반면 그는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단호하게 길을 나선다. '내가 직접 동생을 만나러 가야겠어!' 라면서 말이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멋진 여성.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하지만 영화는 붉은 여왕을 귀양 보내며 끝을 맺는다. '세상의 가장 멋진 사람들은 모두 미쳤어' 라고 부르짖는 팀 버튼의 메시지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일까. 그의 기준으로 보자면 세상에서 가장 멋있을 수도 있는 붉은 여왕에게 일말의 반전이 일어나길 끝까지 기대했지만, 너무나 시시하게 권선징악적인 메시지로 영화는 마무리되고 만다.



▶ 상투적인 권선징악적 마무리가 아쉬워


감독인 팀 버튼은 기괴하고 엽기적인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동화에도 온통 어둠의 마법을 잔뜩 뿌려놓는 것을 좋아한다. 꿈꾸는 아이들의 환타지는 그의 손을 거칠 때마다 늘 현실적인 성장통으로 바뀌곤 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기묘한 상상력으로 많은 팬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런 그가 이토록 교육적이고 상투적인 결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옛날 옛적에(Once upon a time)'로 시작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Happily ever after)'로 끝을 맺는 디즈니 왕국이 이 영화의 제작사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기대해 마지않는 3D 효과 역시 어딘지 부족한 느낌이다. '아바타'로 인해 우리의 기대치가 한껏 높아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채셔 고양이가 투명하게 사라졌다 나타나는 장면이라든가 환상적인 원더랜드의 입체감은 분명 멋지긴 하지만, 극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영화가 반드시 3D여야 하는 이유는 충분히 찾기 힘들다.

팀 버튼이 그토록 강조하던 특출함(muchness)을 앨리스는 결국 발견해낸다. 하지만 팀 버튼 스스로는 그 특출함을 지키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이상한 나라는 기대보다 덜 미쳐버렸고 덜 마니아적이다. 하지만 덜 미친 만큼 반대로 더 경쾌하고 밝아진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이 경쾌함과 극적 재미의 중심에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대갈장군, 붉은 여왕이 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만하다.


정주현/ 영화진흥위원회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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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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