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만남도 헤어짐도 모두 신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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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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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의 인연/최인호 지음/331쪽·1만2000원·랜덤하우스코리아

“누군가로 인해 울고 웃지만 이 인연들 끝까지 간직할 것”

‘인연’에 대해 소설가 최인호 씨(사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밤하늘에 떠있는 별이다. 이 별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소멸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이 신의 섭리를 우리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짧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 인연들, 때때로 후회로 마음 저민 인연들. 혹은 한결같이 감사하고 정겨운 인연들…. 작가는 이 책에서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연의 다양한 모습들을 자신의 삶에 비춰 풀어낸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들이지만, 누군가로 인해 웃거나 울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어머니의 화장’은 일흔이 다 된 뒤 젊은 시절에도 좀처럼 하지 않던 화장에 멋을 내기 시작하셨던 돌아가신 노모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그는 언제나 쥐색 두루마기에 촌스러운 버선만 신고 다니는, 또래의 어머니들에 비해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다. 학교에 어머니가 찾아오는 일이 없도록 선생님께 줄곧 거짓말을 했다. 친척 하나 살지 않는 강릉에 어머니의 친정을 만들어낸 뒤 ‘어머니는 강릉 외갓집에 가셨다’고 말했던 것이다. 수업 참관일에 오신 어머니의 초라한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친구들에게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라고 하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쥐색 두루마기 차림으로 학교에 온 어머니가 다른 학부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몇 발치 떨어져 홀로 걷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재빨리 온실 뒤로 몸을 숨겼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머니께 달려가 인사하고 온실의 꽃들을 구경시켜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적진을 탐색하러 나선 척후병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초라한 어머니를 훔쳐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그 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날 교정 뒤뜰을 천천히 걸어가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한다.

“오래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화장을 하던 날들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여성으로 태어나 어머니로 살다가 여성으로 돌아가셨다. 다시 어머니를 볼 수 있다면 어머니 얼굴에 고운 분을 발라드리고 싶다. 메이크업 기술을 배워서 늙은 어머니 얼굴을 화장해 드리고 싶다.”

이 밖에도 평생소원이었던 자신만의 식당을 차린 뒤 자식에게 줄 음식을 만들듯 정성을 다해 국수를 마는 단골 국숫집 주인, 대스타답지 않게 겸손하고 순수한 성품을 지녀 작가가 무척이나 아끼는 배우 안성기와의 인연도 만나볼 수 있다. 작가가 등단했을 때 심사위원이었으며 결혼식 주례를 맡아줬고 첫딸을 낳았을 때 ‘다혜’란 이름까지 지어준 소설가 황순원 선생과의 인연도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과의 인연을 이처럼 절절하고 애틋하게 하나씩 풀어놓는다. 물론 작가인 그에겐 ‘백지(白紙)’와의 인연 역시 빠뜨릴 수 없다.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입선한 뒤 1966년 정식 등단을 하기까지의 습작기를 회상한 작가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내가 죽음의 자리에 누워 영원히 눈을 감을 때까지 나는 이 인연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쓴 보잘것없는 글들이 이 가난한 세상에 작은 위로의 눈발이 될 수 있도록, 그 누군가의 헐벗은 이불 속 한 점 온기가 되어줄 수 있도록, 나는 저 눈 내린 백지 위를 걸어갈 것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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