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비우고야 채움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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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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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충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 생활공간. 그곳을 고요하게 가로지르는 빛이 어둠을 감싸안으며 풍부한 울림을 남긴다.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팔판동 갤러리 인에서 열리는 정보영 씨의 ‘공간, 숭고의 경계’전은 공간에 대한 회화적 사유와 만나는 자리다. 1997년 첫 개인전 이후 그는 사물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공간을 빌려 대상에 접근해 왔다. 바로크 화가 베르메르처럼 공간 탐구 계열의 화가를 좋아하는 작가. 초기엔 미술사에 나온 공간을, 2005년부터는 실제 공간을 다루기 시작했다.

“청주의 한 미술관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공간 안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관찰하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건물 안팎의 풍경을 내 콘셉트에 맞춰 작업했다.”

창을 마주하고 있는 벽, 그 벽에 걸린 그림액자, 그 유리에 비친 마당의 소나무 한 그루 등 실내외 공간이 한 화면에서 혼융되는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그림은 단순하다. 사다리가 놓인 창고, 잡동사니 하나 없는 정갈한 실내공간, 촛불 옆에 자리한 탁자, 의자와 전기스탠드가 있는 방. 모든 그림 속에는 공간만 덩그라니 있을 뿐 인간은 없다. 그는 “내 작업에는 공간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그림의 한 요소인 만큼 굳이 인물을 그리진 않는다”며 “그림의 주체가 필요할 땐 사람 대신 빈 의자를 그린다”고 설명한다.

어찌 보면 삭막할 법 한데 그가 표현한 빈 공간은 신비하고 초월적 이미지를 품고 있다. 창 밖의 햇빛과 가로등, 실내의 전등과 촛불 등을 끌어들인 캔버스는 일상의 숨겨진 장소를 주목하게 만든다. 우리가 뻔히 보면서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빛과 어둠의 조합을 절묘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과 창으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어둠에도 여러 층과 겹이 있음을 보여주며 공간의 깊이를 체험하게 한다. 빛이 있을 때 어둠은 깊어지고, 어둠이 있어야 빛은 더 환하게 느껴진다는 단순한 진리가 그 속에 녹아 있다. 02-732-4677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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