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로 깎은 유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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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4일 03시 00분


신미경 ‘트랜스레이션’전 시간과 역사의 의미 곱씹어

작가 신미경 씨는 원본이 있는 조각상을 비누로 재현해 동서양, 과거와 현재, 새로움과 낡은 것 등이 본래 자리를 벗어났을 때 생겨나는 가치와 의미를 파고든다.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작가 신미경 씨는 원본이 있는 조각상을 비누로 재현해 동서양, 과거와 현재, 새로움과 낡은 것 등이 본래 자리를 벗어났을 때 생겨나는 가치와 의미를 파고든다.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박물관 유물인 양 그리스 조각상이 줄지어 서 있다. 한데 대리석 조각처럼 보이는 이 조각들은 모두 비누로 제작됐다.

서울과 영국 런던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 신미경 씨(42)가 비누로 만든 조각상 중 4점은 경기도미술관 야외에서 바람과 비를 맞으며 자연적으로 마모된 것이고, 나머지는 원본에 가까운 조각상을 만들어 채색한 작품이다. 그는 비누로 고대 조각상과 도자기를 재현하는 작업을 통해 원본과 복제품, 동양과 서양,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등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12월 19일까지 열리는 ‘트랜스레이션’전에서 시간성과 역사성을 끌어들인 그의 비누 조각을 볼 수 있다.

“강한 재료를 다루기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연약한 재료는 달래가며 작업해야 하므로 시간과 공력이 더 든다. 쉽게 손 안 대고 만드는 것이 훌륭한 작품이라 생각하는 시대에 비누반죽을 만들어 붙이고 깎아내는 작업은 유행과는 반대로 가는 셈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고리타분한 게 뭐냐, 현대적인 게 뭐냐,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의 가치와 의미는 뭐냐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2층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도자기를 재현한 작품을 볼 수 있다. 전통 자수를 하듯 문양을 파서 안료를 채우는 상감작업을 바탕으로 원본을 복제한 작품이자 그가 비누로 만든 오리지널이다. 작가는 이를 다시 원본의 유령 같은 투명 도자기로 제작해 원본과 복제의 순환 시스템을 드러낸다.

비누 작업은 15년 전 런던으로 처음 건너갔을 때 매끈한 대리석과 비누의 질감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 시작됐다. 비누는 닳아지는 속성으로 시간을 기록할 수 있고 일상에서 늘 접하는 재료란 점도 마음에 들었다.

“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 삶이 짧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영원성을 상징하는 대리석 조각을 초고속으로 풍화되는 비누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그는 ‘화장실 프로젝트’를 통해 작품을 만질 수 없다는 고정관념도 뒤집는다. 공공장소의 화장실에 조각을 배치해 사람들이 손을 씻는 동안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작품이 완성되는 것. 전시장 밖 화장실에도 빨간색 비누 불상이 놓여 있다. 부처가 자기 몸을 소진하며 남을 정화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하듯. 02-735-8449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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