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못으로 빛을 박아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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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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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수평선을 따라 찰랑거리는 물결, 나무 잎사귀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황금빛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 비 개인 오후의 상큼한 공기가 느껴지는 숲이 떠오른다.

29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열리는 유봉상 씨의 ‘Nailed Nostalgia’전에서 만난 풍경이다. 1990년 이후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지난해 영구 귀국한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프랑스의 성당과 나무, 바다와 함께 강원도의 숲 등 국내 풍경을 처음 선보였다.

놀라운 사실은 전시장의 그윽한 풍경들이 붓과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 모두 15mm짜리 핀못을 박아 완성한 작품들이다. 작가는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재료 실험을 하던 중 못을 썼을 때 작품에 어떤 리듬감이 생기는 것을 발견한 뒤 못 작업에 매달렸다. 숱한 시간을 바친 끝에 지금은 못으로 극히 세밀한 표현까지 가능한 경지에 이르렀고 전통 회화와 차별화되는 새로운 부조회화가 완성됐다.

못으로 그린 회화에는 구도적 자세의 노동집약적 작업이 담겨 있다. 작가는 먼저 풍경을 촬영해 캔버스 천에 이미지를 출력해 이를 나무에 고정시킨다. 못박는 기계(태커)를 사용해 이미지에 따라 못을 박아나간다. 이어 아크릴 물감을 스프레이로 분사해 바탕 채색을 한 뒤 다시 못을 정교하게 갈아내야 한다.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함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작품 한 점당 평균 7만 개의 못이 들어가는데 이제는 하루 평균 2만∼3만 개 못을 박는 달인이 됐다.

푸른색과 보라색 등 어두운 색조를 배경 삼아 못으로 그린 풍경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 같다. 빛이 쏟아지는 정도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한 프랑스 평론가는 말했다. “못을 사용해서 걸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 못으로 빛을 걸어둘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흔치 않다.”

보잘 것 없는 못이 모여 빛을 가득 담는 그릇으로 새로운 쓰임새를 얻었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못 풍경이 볼수록 아름다운 이유다. 02-519-0800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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