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동학]<2>사대부 가문 문서 연구하는 ‘고문서 강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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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9월 21일 02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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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의 고문서 강독회 회원들이 11일 서울대 규장각 1층 회의실에서 19세기 해남 윤씨 집안의 ‘맹골도 소작료 쟁송 문서’를 읽고 있다. 왼쪽 앞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경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박진호 서울대 교수, 한효정 성신여대 강사, 김경숙 조선대 교수, 김현영 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 한상권 한국역사연구회장, 박현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양진석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관. 전영한  기자
한국역사연구회의 고문서 강독회 회원들이 11일 서울대 규장각 1층 회의실에서 19세기 해남 윤씨 집안의 ‘맹골도 소작료 쟁송 문서’를 읽고 있다. 왼쪽 앞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경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박진호 서울대 교수, 한효정 성신여대 강사, 김경숙 조선대 교수, 김현영 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 한상권 한국역사연구회장, 박현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양진석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관. 전영한 기자
소작 쟁의… 재산 다툼… “역사의 손금 읽어요”
“18, 19세기 서민들의 권리의식이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다른 문서에도 이렇게 서민이나 노비들이 양반들에게 권리를 주장하던 모습이 종종 발견됩니다.”(김인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소송 상대방을 ‘탕자(蕩子)’라고 지칭한 내용이 나오는군요. 그러나 이 부분을 그대로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상대를 비난함으로써 처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김현영 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
낮의 길이가 짧아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11일 오후 7시. 서울대 규장각 1층 회의실에는 연구자 9명이 고문서와 씨름하고 있었다. 2주마다 한 번씩 열리는 한국역사연구회의 ‘고문서 강독회’다. 이날 공부할 문서는 해남 윤씨 가문의 ‘맹골도 소작료 쟁송 문서’였다. 전남 진도군에 있는 맹골도에서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던 서민들이 ‘이병관’이라는 사람을 내세워 소작료가 많다며 섬의 주인인 해남 윤씨 가문과 소송을 벌인 것이다.
고문서 강독회는 한국역사연구회 회원 중 조선시대 문서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이 2003년 3월 만들었다. 연대기적 역사에 가려진 생활 속의 역사를 공부해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자는 취지다. 지난해 경주 손씨 가문의 문서에 이어 올해는 해남 윤씨 집안의 문서에 돋보기를 대고 있다. 모임에는 회원 12명 중 보통 9, 10명이 참석한다.
개인 기록 통해 당시 생활상 파악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이해 가능

해남 윤씨 가문에서 보관 중인 19세기 전남 진도의 맹골도 소작료 쟁송에 관한 문서.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해남 윤씨 가문에서 보관 중인 19세기 전남 진도의 맹골도 소작료 쟁송에 관한 문서.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서의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감에 따라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회의장 분위기는 19세기 전남 진도의 맹골도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어유 5두, 건어 13속 4개, 전복 200개, 남초(담배)값 5냥이 당시 소작료였군요.” “암행어사에게도 청원을 해 윤씨 집안에서 미리 처분을 받아서 관아에 제출했군요.” 규장각 1층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19세기 맹골도의 어장과 논밭으로 가는 타임머신을 탄 것 같았다.
강독회 동안 인터넷을 검색하던 박진호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가 정보를 보탰다. “당시 암행어사는 조귀현이었을 가능성이 높군요. 이 건과의 상관관계를 알 수 없지만 진도군수 조태현을 처벌한 기록도 있습니다.”
연대기적 거대사 연구에도 도움
일반인 위한 사례집 발간 계획도

옛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사를 엿봄으로써 역사에 대한 인식은 그만큼 풍부하고 세밀해진다. 김 교수는 “고문서를 읽다 보면 18, 19세기 서민들이 양반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주들이 흉년 때 사적으로 대량의 곡식을 내놓으며 진휼에 나서는 현장도 목격한다”며 “이 같은 역사 속 현장은 역사를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말했다. 박경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 “강독회의 경험은 다른 논문을 읽거나 연대기적 거대사를 이해하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독회에 참여하는 연구자들의 전공은 사회사, 조선시대 여성경제활동, 환곡, 고문서 번역, 조선시대 가족관계사, 이두 등 다양하다. 강독모임은 이들 전공지식의 자연스러운 교차로 인해 풍성해진다. 이날 강독이 진행되는 동안 △한문을 정확히 읽는 법 △암행어사 출도의 관행 △조선시대 송사 과정 △맹골도 주민의 근대에 있었던 관련 시위 등에 관련된 이야기가 쏟아졌다. 김 교육연구관은 “1936년 동아일보에도 맹골도 주민들이 소작료 때문에 시위를 벌이는 내용이 나온다”고 말했다.
작년에 공부했던 16세기 경주 손씨 가문의 문서에서는 화순 최씨 집안에서 손씨 가문으로 시집간 여성이 사망한 후 벌어진 양 가문의 다툼이 화제였다. 그 여성이 최씨 가문에서 상속받아 손씨 집안으로 데려갔던 노비 39명의 소유권에 관한 다툼이었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은 사실과 노비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재산이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회원들의 관심을 끌었다.
강독회를 이끌고 있는 김경숙 조선대 교수(역사학)는 “고문서 공부를 하다보면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스스로를 노비라고 주장하는 양인’을 만나는 등 재미있는 사례도 접하게 된다”며 “그때마다 고문서 강독의 매력에 빠진다”고 말했다.
강독회는 자신들의 지식을 대중과 공유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강독회가 소속된 한국역사연구회의 한상권 회장(덕성여대 교수)은 “다른 역사학자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월례발표를 넘어 내년에는 일반인을 위한 고문서 강독 사례집을 발간할 계획”이라며 “이런 노력이 역사연구의 생태계를 풍성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19세기 맹골도에 머물렀던 강독회 회원들은 4시간이 지나서도 현실로 제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오후 11시에 시작된 뒤풀이 모임에서는 ‘맹골도에 한번 가보자’는 얘기를 나누며 역사 속 현장에서 벗어나는 아쉬움을 달랬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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