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아트’ 거장 앤디 워홀의 고향 美 피츠버그를 가다

  • 입력 2009년 9월 15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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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고향인 피츠버그 시의 교회 묘지에 묻힌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그의 묘비 앞에 참배객이 가져다놓은 듯한 수프 깡통과 코카콜라 병, 동전이 놓여 있다. 바로 뒤쪽으로 워홀 부모의 묘비가 보인다. ② 1934∼49년 워홀 가족이 살았던 이층집 앞에 친형 존 워홀라 씨가 서 있다. ③ 워홀이 세례를 받고, 뉴욕으로 떠나기 전까지 다녔던 비잔틴 가톨릭교회. 피츠버그=고미석  기자
① 고향인 피츠버그 시의 교회 묘지에 묻힌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 그의 묘비 앞에 참배객이 가져다놓은 듯한 수프 깡통과 코카콜라 병, 동전이 놓여 있다. 바로 뒤쪽으로 워홀 부모의 묘비가 보인다. ② 1934∼49년 워홀 가족이 살았던 이층집 앞에 친형 존 워홀라 씨가 서 있다. ③ 워홀이 세례를 받고, 뉴욕으로 떠나기 전까지 다녔던 비잔틴 가톨릭교회. 피츠버그=고미석 기자
현대미술 아이콘 보여주듯 소박한 묘비 위엔 콜라 병이…

수프 깡통과 콜라 병 등 일상의 이미지를 작품에 끌어들여 예술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도록 만든다. 자신의 작업장을 ‘팩토리’라 명명하고 스스로 작품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마존 도서검색에서 그의 이름을 치면 1만5000여 종의 목록이 뜬다. 바로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 워홀(1928∼1987)의 얘기다. 12월 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릴 대규모 개인전을 앞두고 그가 태어나 자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시를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워홀의 삶과 예술을 소개한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남쪽으로 25분가량 자동차로 달리면 워홀이 묻힌 비잔틴 가톨릭교회 묘원이 나온다. 야트막한 푸른 언덕 위에 자리한 묘지엔 아무런 안내 표지판도 없으나 무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참배객들이 놓고 간 캠벨 수프 깡통과 코카콜라 병이 멀리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나침반 삼아 언덕배기 중간쯤 올라가니 이름과 생몰연도가 새겨진 수수한 묘비가 나타난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 무덤 곁에 조용하게 잠든 워홀. 고향 피츠버그의 소박한 무덤과 뉴욕에서 당대 인사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추구했던 현대미술의 아이콘이란 이미지. 이들은 곧 그가 가진 패러독스를 상징하는 듯했다.

가난한 슬로바키아 이민출신 막내
기행적이고 화려한 이미지 이면엔
자선-봉사 등 성실하고 예의바른 삶

○위대한 예술가, 인간적 면모

현재 피츠버그 시에는 워홀의 손위 형제와 그들의 자녀 등 대부분 가족이 살고 있다. 특히 생전에 그와 가장 친했던 형 존 워홀라 씨(84·앤디 워홀 재단 부이사장)는 지금도 동생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열성적으로 나선다.

아들 마크와 함께 워홀의 발자취를 직접 보여주겠다며 가이드를 자처한 그는 “어린 시절 워홀은 다른 아이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을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며 “성공한 뒤에도 변함없이 고향에 남은 가족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다”고 회고했다.

워홀은 슬로바키아 출신 가난한 이민자였던 안드레이와 줄리아 워홀라 부부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14세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남은 형제들에게 “막내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잘 돌보라”는 유언과 함께 통장을 남겼다. 그 덕분에 집안에서 처음 대학문을 밟은 그는 카네기멜런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뒤 1949년 뉴욕으로 건너간다. 이곳에 정착해 상업미술가로 활동하던 그는 광고와 상품, 미디어에 나온 이미지를 순수미술에 끌어들여 팝아트 운동의 선구자로 성공을 거둔다.

존 워홀라 씨는 그의 가족이 셋집을 전전한 끝에 처음 장만했던 도슨 거리 3252의 2층 집으로 기자를 데려갔다. “앤디가 여섯 살 때 이사와 스물한 살 때 뉴욕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집에는 라디오도 없고 TV란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3형제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뒤 가장 잘 그린 사람에게 사탕을 선물로 주었다. 물론 사탕은 죄다 앤디 차지였다. 하하”

다락방에서 지내다 2층 방으로 내려온 워홀은 이 집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셴리 고교를 다녔다. 전차를 탈 돈도, 자동차도 없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걸어 다녔던 학교는 이제 다른 곳으로 이전했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일상을 예술로 바꾸기까지

한때 철강도시로 번성했던 피츠버그 시에는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그 중심에는 워홀 가족이 다녔던 세인트 존 크리소스톰 비잔틴 가톨릭교회가 있었다. 도슨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거리에 자리한 교회는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건물이었다. 워홀라 씨는 “우리 가족에게 교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며 “1910년 건립된 이곳에서 앤디는 세례를 받았고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매주 예배를 드렸다”고 말했다.

동성애자에 화려한 파티광으로만 소문난 이미지의 이면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불평 없이 성실하게 일하는 태도도 있었다. 워홀라 씨는 말했다. “사람들은 앤디가 특이한 기행이나 부와 명성만 추구한 것으로만 알지만 그는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추수감사절에 교회를 찾아가 노숙인들을 돕는 봉사를 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인사를 건넬 정도로 워홀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했다. 무엇보다 그는 단 한번도 작업을 쉰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한 예술가였다.”

일찌감치 동시대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알아채고 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워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벽을 허문 그의 예술은 가족과 일상의 의미를 소중히 여겼던 삶에서 길어 올린 열매이기도했다.

피츠버그=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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