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드의 규칙성, 불규칙한 거리의 ‘쉼표’

  • 입력 2009년 9월 9일 02시 59분


코멘트
서울 노원구 중계동 데미안 빌딩의 외벽 디자인은 주변 상가 간판의 어지러운 흐름을 정돈해 준다. 상품 바코드를 닮은 콘크리트 막대들의 조합(위)이 거리에 색다른 표정을 더했다. 뒤뜰 위의 수직 트임(아래)과 옥상 테라스 등 건물 내부 곳곳에 휴식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사진 제공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
서울 노원구 중계동 데미안 빌딩의 외벽 디자인은 주변 상가 간판의 어지러운 흐름을 정돈해 준다. 상품 바코드를 닮은 콘크리트 막대들의 조합(위)이 거리에 색다른 표정을 더했다. 뒤뜰 위의 수직 트임(아래)과 옥상 테라스 등 건물 내부 곳곳에 휴식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사진 제공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
김승회 교수-강원필 씨 설계
서울 중계동 ‘데미안 빌딩’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밋밋한 상점가에 영화 ‘매트릭스’ 오프닝 장면을 연상시키는 묘한 건물이 섰다. 김승회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와 강원필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장이 함께 설계한 근린생활시설 ‘데미안 빌딩’. 입면을 감싼 채광창 디자인이 영화 속 주인공 네오가 누비던 가상현실의 ‘매트릭스 폭포’를 닮았다.

하중을 지지하는 두툼한 노출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다양한 굵기의 콘크리트 막대가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막대의 두께는 15∼120cm로 각각 15cm의 배수를 이룬다. 4층 높이 건물 꼭대기부터 2층까지 이어지다 멈추기도 하고, 3층 중간쯤에서 시작해 바닥에 닿기도 한다.

이 채광창 디자인은 건물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다. 거리를 따라 숨 가쁘게 이어지던 간판들의 아우성은 이곳에 이르러 흐릿한 쉼표를 맞는다. 서로를 누르고 자신을 돋보이려 애쓰는 상점 간판들의 다툼이 이 입면 위에는 없다. 건물에 입주한 병원과 약국은 1, 2층 경계를 가른 돌출 차양에 소박한 이름표 하나씩만 붙였다.

김 교수는 “주변 거리 간판들로 인한 어지럽고 이기적인 ‘나열의 관성’을 흔들고 싶었다”며 “건물 자체의 존재를 노출시킴으로써 거리의 품격을 높여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언뜻 불규칙한 나열처럼 보이는 매트릭스가 꽉 짜인 규칙을 가지듯, 상품 바코드를 닮은 데미안 빌딩의 입면 이미지는 불규칙한 거리를 정돈한다. 빽빽이 늘어선 식당, 노래방, 미용실, 제과점, 술집 간판의 틈을 검붉은 타일로 대강 메운 상가 거리가 3월 완공한 이 건물 덕택에 전에 없던 ‘표정’을 얻었다. 건물 안에서 내다보는 거리 풍경도 채광창을 통해 흥미롭게 굴절된다.

그 표정은 주변과 다르면서도 혼자 ‘튀지’ 않는다. 콘크리트와 유리, 스틸 프레임을 섞어 짠 무채색 입면은 주변의 혼란을 가라앉히지만 흐름을 끊지 않았다. 건물 상단에 노출시킨 검붉은 스틸 모서리는 검붉은 주변 건물들과 접점을 이루도록 한 디테일이다.

거푸집을 더 꼼꼼히 만들어야 했던 작업 외에는 흔히 보는 콘크리트 건물과 공정이 다르지 않았다. 섬세한 디테일의 입면과 달리 내부 공간 구성은 간결하다. 건물 뒤편 주차타워를 둘러싸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중정(中庭)을 만들어 휴식 공간을 배려했다. 2층까지 널찍하게 틔워 낸 출입구는 보행자 통로와의 경계에서 안쪽으로 훌쩍 물러나 있다. 보행자 공간을 서슴없이 침범하는 요즘 상가 건물과 다른 배려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