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 있고… 소실되고… 고려사 ‘미로 찾기’

  • 입력 2009년 7월 23일 03시 16분


유물-1차 사료 부족해 연구에 한계
2000년대 들어 ‘고려사’ 완역 등 활기

전문 연구자 70여 명, 2008년 관련 논문 100여 편. 최근의 고려사 연구 현황이다. 조선시대 관련 논문이 한 해 200여 편에 이르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고려사 연구 부진의 가장 큰 이유는 사료와 유물의 부족. 삼국시대는 남한 지역에 여러 유적이 남아 있어 발굴이 활성화됐고 조선시대는 유적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등 1차 사료가 풍부하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는 “1차 사료도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유적이나 유물은 대부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 집중돼 있다”며 “사료 연구와 발굴 모두 더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려의 경우 당시의 정사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등 조선시대 전란 때 소실됐다고 알려져 있다. 남아 있는 1차 사료는 이승휴나 이규보 등 당대 문인들의 문집,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려 역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높아 고려사를 객관적으로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불교문화가 융성하면서 매장보다는 화장이 성행했던 것도 고려사 연구를 가로막는 이유 중 하나다. ‘태조 왕건’(일빛)을 펴낸 김갑동 대전대 교수는 “고려 공신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경기 파주시의 ‘고려통일대전’ 외에는 고려 유물을 제대로 모아 놓은 곳이 없었다”며 “자료가 흩어져 있고 고려사를 제대로 연구하는 대학 연구소도 없을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고려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2006년 고려시대 묘지문을 모은 ‘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출판부)이 발간되고 동아대 석당학술원에서는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모아 1972년 완역됐던 ‘고려사’를 재번역하는 등 1차 사료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개성관광이 시작되고 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서 2008년 11월에는 개성에 있는 고려 만월대 유적(옛 궁궐터)에 대한 남북 공동발굴도 실시됐다. 태조 왕건을 비롯한 고려 왕 5명의 어진을 모신 경령전을 발굴해 당대 궁궐의 구조와 규모를 밝혔다. 올해 초에는 대전 유성구 상대동에서 고려시대 대형 건물지가 발굴되기도 했다.

박 교수는 “고려는 불교와 도교, 유교 등 다양한 사상을 바탕으로 한 개방성과 역동성을 갖춘 다원사회였다”며 “21세기 한국사회 역시 다문화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현대에 되살릴 수 있는 연구가 더욱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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