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테마 에세이]기차<3>김종광

  • 입력 2009년 7월 17일 02시 55분


느려터져서 더 그리운…

비둘기보다 빠른 통일, 통일보다 빠른 무궁화, 무궁화보다 빠른 새마을. 기차는 숨 가쁘게 빨라졌다. 그토록 빨라졌건만, 기차역까지 오고가는 시간, 일상적인 늦도착 등을 고려하면, 자가용보다 느리기 일쑤다. 정말 차가 더 빠르다. 기차보다 더 빠른 자가용의 시대에 느림보 기차는 무엇이었을까.

1989년 겨울, 기차를 2박 3일 탄 적이 있다. 보령에서 장항까지 비둘기. 장항에서 군산까지는 배. 군산에서 익산까지 비둘기. 객차가 달랑 두 량짜리였다. 이렇게 짧은 기차가 다 있었네! 익산에서 여수까지 통일호. 여수에서 짧은 비둘기로 순천. 기다린 비둘기로 순천에서 해운대까지. 리듬감 넘치는 전라도 사투리는 곧 격동이 센 경상도 사투리로 변하여 죽 계속되었다. 해운대에서 충북 제천까지 통일호, 제천에서 천안까지 비둘기, 천안에서 대천까지 통일호.

기차여행을 마친 내 소감은 아주 간단히 말해서 “우리나라도 참 넓구나!”였다. 겨우 사흘 동안 수박 겉핥기 한 주제에 보면 무얼 봤겠는가, 하지만 딴에는 참으로 드넓은 우리나라의 산과 강과 들판을 보았던 것이다. 또 수백 명의 충남 전북 전남 경남 부산 경북 충북 사람들을 만나 말이 다름을 귀로 절감했던 것이다. 비둘기호의 느림은 어쩔 수 없이 사색하게 만들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한없이 느려 터졌다. ‘느림의 미학’을 체험했던 것이다.

KTX가 등장하고서야 기차도 자동차와 도긴 개긴은 될 만큼 빠른 축에 들게 되었다. 하지만 KTX의 엄청난 속도를 보장해주기 위해서, 더욱 자주 지체하게 된 새마을과 무궁화는 속도 면에서는 ‘기차’도 아니게 되었다. 무궁화는 그렇다 치고, 20여 년 전에 처음 나왔을 때 비행기 아우급 성찬을 받았던 새마을은, 세상인심 참 야박하다고 눈물 흘릴 만하다. 비둘기와 통일은 구시대의 유물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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