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카페]야구와 다시 사랑에 빠졌어요

  • 입력 2009년 6월 19일 02시 56분


얼마 전 집 안 책장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그 옛날 20대의 박철순 OB베어스 투수가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는 표지 사진의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야구’란 책이었죠. 첫 장을 넘기자 낯익은 글씨가 나왔습니다. ‘선미의 ○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1982년 ○월 ○일. 사랑하는 아빠가.’

1982년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삼성라이온즈 어린이 회원이 된 제게 그 책은 야구의 세계로 가는 마법의 가이드북이었죠. 당시 스포츠 라이터와 언론인들이 쓴 지금은 책장이 샛노랗게 변한 그 책을 넘기다 보니 재밌는 구절이 꽤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야구 감상법-야구 시합을 감상할 때 어느 한 편을 들어서 이기고 지는 것에 즐거워하거나 섭섭해 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내가 응원하지 않는 상대편 팀이라도, 그들이 어떻게 게임을 하는지 잘 관찰해 보면 재미가 있다.’(56p), ‘사실 베어스나 라이온즈, 타이거즈보다는 곰들, 사자들, 호랑이들 하고 부르는 게 나을 듯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순수한 우리말을 썼으면 어땠을까요? 즉 돌쇠들, 깍쟁이들, 방망이들 하고 말입니다.’(164p)

일기장 가득 ‘야구에서 인생을 배운다’는 절절한 내용으로 채워지고, 정규 TV중계방송이 끝나면 라디오 주파수를 황급히 맞춰 경기 결말에 귀 기울이고, 선수들의 방어율과 타율을 소수점 세 자리까지 줄줄 외우던, 못 말리는 ‘한국 프로야구 키드’의 생애는 입시지옥을 거치며 야구를 ‘끊는’ 암흑기간을 맞았습니다. 오랜 시간 눈물을 흘리며 원통해했죠.

저는 어른이 돼서 다시 한국 야구를 봅니다. 예전엔 ‘아저씨들’이었던 선수들이 지금은 열 살 이상 어린 ‘동생들’로 바뀐 야구를 말입니다. 아줌마 직장인이 된 ‘한국 프로야구 키드’는 주책 맞게 선수들의 건강한 섹시미에 마음 설레기도 하고, 감독의 시선에서 ‘나는 과연 조직에서 몇 번 타자일까? 감독이 위기 상황에 믿고 투입할 수 있는 투수가 될까?’라고 자문해보기도 합니다. 남자는 왜 야구를 보느냐고 어느 선배에게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입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그 노인은 고기와 싸우면서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를 생각하는데 왜일까? 야구에서 자신의 인생을 읽은 건 아닐까?” 전 미국 뉴욕 양키스의 요기 베라는 야구계의 잠언으로 불리는 “It ain't over, till it's over”(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란 말도 했었죠. 세상살이가 빡빡해서인지 야구와 다시 깊은 사랑에 빠지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규모가 축소된 프로야구 어린이회원 제도가 안타까워 조카들 생일 선물로 ‘어린이회원’을 안겨주려 합니다

김선미 산업부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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