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산수’서 추상화풍까지… 팔순에도 진화한 ‘겸재’

  • 입력 2009년 5월 12일 02시 58분


■ 정선 서거 250주기 간송미술관 특별전

화가의 그림은 60대부터 확연하게 달라진다. 고유한 화법으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담아낸 진경산수의 본 면목을 보여준 기준작으로 꼽히는 ‘청풍계(淸風溪)’를 그린 것이 64세 때. 36세 사대부 화가에게 ‘조선 최고의 화가’란 영예를 안겨준 금강산의 황홀한 경치를 36년 만에 다시 그려낸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완성한 때가 74세다. 그는 말년에 또 다른 변화에 도전한다. 70대 중반부터 83세에 타계할 때까지의 작품에선 단순한 색조와 대담한 생략으로 대상의 본질만 뽑아낸 추상적 경향이 짙게 드러난다.

겸재 정선(謙齋 鄭선·1676∼1759). 진경산수화를 창안해 절정기를 이끌었고 인물 화훼 초충에 두루 능했던 조선 후기의 대가, 그는 늘 진화를 거듭한 화가였다. 겸재의 250주기를 맞아 그의 웅숭깊은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마련됐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17∼31일 봄 정기전으로 준비한 ‘겸재 서거 250주년 기념 겸재 화파전’. 겸재의 변모과정을 보여주는 80여 점과 조영석 이광서 심사정 김홍도 신윤복 등 그의 영향을 받은 후대 화가의 작품까지 110여 점으로 꾸며진다. 250주기를 맞아 최근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겸재정선기념관이 개관했으며 국립중앙박물관도 전시를 계획 중이다.

중국 회화의 영향을 받았던 조선 화단에 겸재가 꽃피운 진경시대는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그런 점에서 겸재는 화성(畵聖)이라 불러 마땅하다는 것이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67)의 말이다. 북방화법의 특장인 필법과 남방화법의 특장인 묵법에 정통했던 겸재는 두 기법을 조화롭게 구사해 흙산과 암벽이 어우러진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을 표현했고, ‘주역’을 바탕으로 그림에 음양조화의 원리를 과감하게 도입해 중국에서까지 그 명성이 자자했다는 것.

최 실장은 “겸재는 30대에 진경산수의 기틀을 완성했고 60대부터 그 세계를 확고하게 다져나갔다”며 “남이 알아주면 자만하기 쉬운데 일찍부터 대가로 인정받은 겸재는 죽기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고 겸손하게 노력함으로써 화성의 자리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세 점의 ‘총석정’을 살펴보면 그 말이 실감 난다. 화가는 60, 70대 초반과 후반에 똑같은 실경을 그렸지만 각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후기로 갈수록 대상에 집중하는 힘은 강화되고 난만한 경지를 보여준다. 풍경의 재현보다 자신의 느낌에 충실해지는 경향도 드러난다.

겸재가 우리나라 회화 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화가로 꼽히기까지 많은 이의 숨은 조력이 있었다. 특히 어린 시절 겸재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진 영조는 평생 그를 지극하게 아끼고 후원했다. 영조는 겸재에게 양천현감 자리를 맡겨 한강을 마음껏 사생하도록 도왔으며 사후에는 정2품 한성판윤을 추증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눈 밝은 간송 전형필이 있었다. 겸재 그림이 조선 후기 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할 문화유산이란 사실을 알고 간송이 집중적으로 수집한 덕에 겸재 그림이 한곳에 모일 수 있었다. 더불어 30여 년을 겸재 연구에 매달린 최 실장이 있었기에 겸재의 재평가가 가능했다. 그는 위대한 화성의 면모를 샅샅이 밝히고 ‘진경시대’란 말을 정착시켰다. 최 실장은 필생의 연구를 원고지 4000여 장에 축적한 저술 작업을 마치고 올해 안에 이를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박연폭포와 금강산그림 등 웅혼 장쾌한 산수를 비롯해 겸재가 얼마나 세필에 능했나를 보여주는 인물화와 한없이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초충도도 볼 수 있다. 무료. 02-762-0442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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