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다원예술축제 화제의 실험작

  • 입력 2009년 4월 9일 03시 01분


‘Hell’ 야성적 관능언어

‘카를…’ 유쾌한 두뇌체조

12일 막을 내리는 다원예술축제 봄에서 소개한 실험작 중 2편은 두고두고 화제가 될 만한 작품이었다. 다큐멘터리 기법을 연극에 접목한 독일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과 몸의 언어를 탐구한 이탈리아 출신 무용가 에미오 그레코의 관능적 무용극 ‘Hell(지옥)’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점점 가벼워져가는 연극이 발상의 전환을 통해 어떻게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낚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연출자 헬가르트 하우크와 다니엘 베첼 씨는 200여 명의 실제 인물을 인터뷰한 뒤 선정한 20대 초반∼60대 후반 8명의 실제 삶을 기막히게 직조해 흥미진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극예술을 내놨다. 자본론을 두 차례나 번역한 인연으로 한국 공연에 특별 출연한 강신주 동아대 교수의 사연이 다른 7명의 생애와 앙상블을 이룬 점은 세미다큐멘터리 연극의 무한증식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연극은 마르크스가 우리 시대의 삶에 미친 영향을 일깨우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관객은 공연 중간 배우들이 나눠 준 ‘자본론 1권’에서 연출자들이 발췌해 놓은 부분을 함께 읽으면서 난해한 자본론 1권의 진수에 다가설 수 있는 체험을 했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 시절 옛 소련 치하의 기차간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 굶어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두 덩이의 빵과 우유에 팔려갈 뻔했던 리투아니아 영화감독의 체험담은 상품의 교환가치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의 살아있는 교재가 됐다.

‘카를 마르크스…’가 감각에 억눌린 두뇌 체조의 즐거움을 일깨운 공연이었다면 ‘Hell’은 이성에 억눌린 몸의 언어를 일깨우는 충격적 공연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에미오 그레코와 네덜란드 연출가 피터르 스홀턴은 지옥은 고통의 공간이란 통념을 깨고 지옥을 오로지 본능과 관능에 충실한 풍경으로 그려냈다.

공연 전부터 흥겨운 댄스음악에 맞춰 립싱크를 하며 춤을 추던 무용수들이 돌연 침묵 속에서 때론 발작처럼 때론 전율처럼 보이는 춤사위를 펼쳐냈다. 언뜻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같아 보이던 그 동작들은 이윽고 적나라한 관능의 언어임이 드러났다. 공연 후반부 아예 전라로 춤을 추던 무용수가 서로 다른 무용수의 속옷으로 갈아입는 장면은 ‘벌거벗은 본능이 무아지경에 이른 공간’으로서의 지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직접 출연해 전라의 춤까지 펼친 그레코의 춤사위는 야성적 마력을 뿜어냈다.

아치형의 ‘빛의 문’과 메마른 ‘죽음의 나무’만 등장시킨 채 빛과 어둠이 극명히 교차하는 공간을 연출한 무대와 헐렁하면서도 땀에 젖으면 마치 피부처럼 밀착돼 꿈틀거리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의상도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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