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양시에 사는 주부 김현정(36) 씨는 요즘 돌을 갓 지난 아기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고 입을 오물거리며 옹알이를 하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바로 이 시기가 아이의 어휘력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아기의 몸짓이나 옹알이에 부모가 적극적으로 반응할수록 어휘력이 향상된다고 과학자들은 조언한다.
○ 몸짓-표정 다양할수록 어휘력 풍부
갓 입학한 아이들이 학교 공부에 잘 적응하려면 어휘력이 풍부해야 한다고 많은 전문가는 말한다. 또래보다 어휘력이 부족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학습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 미어디스 로웨 박사와 수전 골든메도 박사 연구팀은 아기의 어휘력 발달이 돌 직전부터 이미 시작된다고 과학학술지 ‘사이언스’ 13일자에 발표했다.
이 연구팀은 시카고 지역에서 14개월 정도의 아이가 있는 가정 중 경제수준과 부모의 교육수준이 다양한 50가구를 선별했다. 가구마다 아이와 아이 돌보는 사람이 집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모습을 90분 동안 비디오로 녹화했다.
40개월이 지난 뒤 연구팀은 아이들(54개월)의 어휘력을 측정해봤다. 어휘력이 풍부한 아이는 평균 117개 단어를 이해했다. 어휘력이 떨어지는 아이는 93개에 그쳤다.
연구팀은 아이들이 14개월 때 찍은 비디오를 다시 분석했다. 그 결과 어휘력이 좋은 아이들은 90분 동안 평균 24가지의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몸짓을 사용했다.
반면 어휘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의 몸짓은 13가지에 그쳤다.
골든메도 박사는 또 “어휘력이 좋은 아이들의 가정에서는 어른들이 자녀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며 더 복잡한 문장을 사용했다”고 분석했다.
아기가 몸짓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개인차가 있지만 대개 8∼10개월부터다. 로웨 박사는 이번 연구결과에 대해 “아기가 몸짓 표현을 시작한 때부터 14개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주위 어른들이 어떻게 반응해 줬느냐에 따라 40개월 뒤 어휘력 차이가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아이가 몸짓으로 의사 표현을 할 때 부모가 알맞은 반응을 해주는 게 향후 언어 학습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손으로 인형을 가리키면 부모가 “그래, 그건 인형이야”라고 말하면서 함께 대화를 해주라고 로웨 박사는 조언한다. 바로 그때 아이는 주의를 집중하면서 자기가 본 물체에 ‘인형’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다양한 단어를 습득해 결국 어휘력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연구팀은 추측했다.
○ 말뜻보다 정서적느낌 먼저 알아채
단어만 많이 안다고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 말에 나타나는 정서를 파악하는 능력까지 길러야 한다.
특히 한국말은 말의 높낮이나 세기 등에 따라 의미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굵고 낮게 “이놈” 하면 주의를 주는 뜻이지만, 짧고 장난스러운 어투면 귀여움을 표현하는 말이 된다. 결국 정서와 의미 정보를 종합해야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대 심리학과 남기춘 교수팀은 성인을 대상으로 특정 단어를 봤을 때 정서와 의미 정보가 뇌에서 인식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남 교수는 “정서 정보가 먼저 활성화됐다가 0.1초 내에 사라지고, 그 이후에 의미 정보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전에 이미 말에 포함된 정서부터 전달된다는 얘기다. 말 못하는 아기가 엄마가 하는 말의 높낮이나 세기로 야단인지 칭찬인지를 눈치 채는 것도 말의 정서 정보를 먼저 배우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임소형 동아사이언스 기자 soh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