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2>사람의 한평생

  • 입력 2009년 2월 9일 02시 59분


◇사람의 한평생/정종수 지음/학고재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를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왜 아들이면 금줄에 고추를 달고 딸이면 솔가지를 달았는지…해답을 딱딱한 이론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찾고자 했다. 스물다섯 해 동안 필자가 머리로 생각하고 발로 뛰며 알아낸 한국 전통 의례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다.”》

태교부터 장례까지 전통의례 총망라

자식, 특히 아들을 낳기 위해 바위 샘 돌 서낭당 칠성당 등에 비는 기자(祈子) 행위, 출산 때의 풍습, 아기가 백일을 맞았을 때의 풍습, 어른이 됐을 때의 풍습, 궁합….

출생, 관례, 혼례, 장례, 상례 같은 통과의례 풍속을 다양한 사례로 풀어냈다.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저자의 공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선조들의 태교 방법은 어땠을까. 태교에 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 말 정몽주의 어머니가 남긴 ‘태중훈문(胎中訓文)’이다.

정몽주의 어머니 이 씨는 “선현들의 지나간 행적을 더듬고 그에 관한 책을 읽으며 나도 그와 같은 위인을 낳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보통 인간이 행하기 힘든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태교를 강조한 지침서도 있다. 1801년 편찬된 ‘태교신기(胎敎新記)’에는 “잉태 시 부친의 청결한 마음가짐은 모친의 열 달 못지않게 중요하다…헛된 욕망이나 요망하고 간악한 기운이 몸에 붙지 않게 하는 것이 자식을 가진 부친의 도리다. 고로 아기가 똑똑하지 못한 것은 부친의 탓이다”라고 적혀 있다.

허준도 ‘동의보감’에서 “장차 태어날 아이의 성품은 물론, 한 가정의 길흉화복조차 아버지의 마음가짐에 좌우된다”고 말했다. 가부장적 조선시대에 태교를 여자만이 아닌 부부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한 점이 이색적이다.

저자는 460여 년 전 조선시대의 돌잔치로 안내한다. 1552년 1월 5일 경북 성주에 사는 양반 이문건이 남긴 기록이다.

“손자 숙길이의 돌날이다…옥책, 붓과 먹, 벼루, 활, 도장, 쌀, 떡 등의 여러 물건을 차리고 숙길이를 동쪽 벽에 앉혀 놓아…숙길이가 엉금엉금 기어…필묵을 쥐고 한참 동안 가지고 놀았다…또 활을 집어서 놀다가…쌀그릇 옆에 앉더니 쌀을 쥐고 다시 앞으로 가 도장을 잡고 놓았는데…다시 실을 잡고 흔들었다.”

오늘날의 돌잔치에서 흔히 보는 ‘돌잡이’와 다를 게 없다. 첫돌을 맞은 아기는 돌빔을 입혔는데, 장수를 기원하는 돌띠를 매줬고 복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돌주머니를 채웠다.

대체로 중국의 예법을 따른 조선시대에 중국과 다른 풍습이 있었다.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는 혼례 풍속이다. 저자는 “이는 양이 음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의 예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왜 남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지 못한 것일까. ‘세종실록’에 답이 있다.

세종이 김종서에게 묻자 김종서가 답했다.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면 거기에 필요한 노비와 의복 기구와 그릇 등을 모두 여자 집에서 바로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곤란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사흘이 지나야 시신을 입관했다. 공자는 “사흘이 지나 염을 하는 것은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고 말했다.

저자는 “소생을 바라는 마음과 함께 장례를 치르기 위한 물품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며 “사흘 뒤 입관은 생명존중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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