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얼쑤~” 장단에 서양 고전이 판소리로 변하고…

  • 입력 2009년 1월 29일 02시 58분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이 우리 전통 창극으로 변신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묘 역의 임현빈 씨, 주리 역의 박애리 씨, 안숙선 명창. 김경제 기자
국립창극단 연습실에서는 셰익스피어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이 우리 전통 창극으로 변신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묘 역의 임현빈 씨, 주리 역의 박애리 씨, 안숙선 명창. 김경제 기자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현장 가보니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복을 입었다.

전북 남원 귀족 최불립의 딸 주리와 경남 함양 귀족 문태규의 아들 로묘가 주인공이다. 배경은 남원과 함양 사이에 있는 고개인 팔량치. 2월 7∼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을 만나볼 수 있다. 국립창극단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처음으로 우리 전통 창극으로 재해석해 무대에 올린다.

안숙선(중요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병창 보유자) 명창이 이 작품의 소리 작곡을 맡았다. 28일 오후 셰익스피어의 고전과 창극이 어우러지는 국립창극단 연습실을 찾았다.

○ 창극에 담은 서양 고전

이날 연습실에서는 제4장 굿판 연습이 한창이었다.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가면무도회에서 만났지만, 한국의 로묘와 주리는 집안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백중날 재수굿판에서 조우한다.

로묘 역의 임현빈 씨가 굿거리로 들어간다. “섬섬옥수 날 부르네. 가까이 가까이 더 가까이, 아… 찰나의 시간 속에 새 세상이 열리는구나.”

“오페라 같으면 팔을 쭉 뻗어서 표현하겠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되겠니? 손짓 하나 몸짓 하나를 다 생각해야 한다.”(안 명창)

안 명창은 곡선을 그리는 팔 동작, 부끄러운 듯 물러나는 몸짓을 직접 해보이며 로묘와 주리의 연기를 지도했다.

“서양 고전을 우리 것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는 좋아. 다만 우리 색깔과 전통을 살리는 게 관건이지. 해학적으로, 돌려 표현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잖아? 이 작품은 ‘죽여버리겠다’ 같은 직설적인 대사가 등장하니까 소리로 표현하기 쉽지 않아.”

주리 역을 맡은 박애리 민은경 씨는 쉬는 시간에도 작품 분석에 몰두했다. 민 씨는 분홍색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정신을 모으고 있었다. MP3플레이어에는 안 명창이 작곡한 소리 가락이 명창의 목소리로 담겨 있다. 박 씨의 대본에는 갖가지 곡선이 가득했다. 음의 높낮이를 기록하는 그만의 ‘기호’다. 소리꾼은 악보 대신 이렇게 가락을 익힌다.

○ 로미오-줄리엣 vs 로묘-주리

창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우리 전통 예술의 실험적 시도다. 국립창극단은 2007년 사실주의 희곡 ‘산불’을 창극으로 만들어 관객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로미오…’의 극본과 연출을 맡은 박성환 씨는 “창극이 서양 고전 작품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면서 “판소리 어법의 가능성을 알리고 창극이 전통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기 바란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한국 전통의 정서와 신명으로 바꿔내는 이번 작업에 참여한 단원들은 서양의 감성을 우리 전통 창극으로 어떻게 바꿔낼지에 골몰하고 있다.

“판소리가 옛날 것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기존의 다섯 바탕 외에 동시대 젊은 관객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레퍼토리를 도입해야 합니다.”(박성환 씨)

단원들은 작품의 분위기가 낯설긴 하지만 창극 무대에서 멋진 러브스토리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보인다.

민 씨는 “사랑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면서 “한국식 사랑 표현을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최불립 역을 맡은 김학용 씨는 “원작에서 줄리엣의 아버지는 엄한 느낌을 주지만 창극에서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판소리의 아니리(다른 대목으로 넘어갈 때 자유롭게 사설을 엮어나가는 행위)로 풀어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임현빈 씨는 “잘 알려진 스토리인 만큼 한국식으로 표현하기 위한 몸짓 연기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이번 창극에서는 무녀의 의식과 북청사자춤, 줄타기, 꼭두각시놀음, 씻김굿 등 다양한 전통연희도 곁들여진다.

안 명창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한국식으로 소화하되 원작의 아름다움, 진지함, 긴장감도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인공 커플은 단체 연습을 마친 뒤 안 명창의 손에 이끌려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3시간이 넘도록 ‘과외’가 이어졌다. 그들의 대본 옆에서는 보이스 리코더가 명창의 소리를 열심히 담고 있었다. 2만, 3만 원. 02-2280-4115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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