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굿바이 잡스, 아듀 맥월드

  • 입력 2009년 1월 16일 02시 57분


‘맥월드 2009’ 6, 7일 참관기

2001년, 지구상에는 ‘아이팟’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매끈한 광택을 자랑하는 이 신종 바이러스의 색깔은 블랙 아니면 화이트. 21세기 바이러스답게 그 모양새가 꽤나 모던하고 심플했다.

이 바이러스의 등짝에는 한 입 베어 먹은 사과(Apple) 문양이 찍혀 있었다. 바이러스의 전염 속도는 매우 빨라서 최초 출현지역인 미국을 시작으로 삽시간에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대륙 등 세계 전 지역으로 뻗어나갔다.

바이러스 감염자가 늘어나자 미국에서는 이들을 일컫는 ‘애플 정키(Apple Junkie·애플 중독자)’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애플 정키들은 이후 등장한 아이팟 바이러스의 변종들인 ‘셔틀’, ‘나노’, ‘폰’에도 쉽게 감염됐다.

2007년이 넘어서자 아이팟과 그 변종들에 감염된 사람들의 수는 1억 명을 넘어섰다.

이것이 2000년대 전자업계를 강타하고 제품 디자인의 신화를 이룩한 아이팟의 진화 스토리다.

○ 맥 빠진 맥월드

애플 정키들에게 애플 바이러스의 모든 것을 지휘하는 스티브 잡스는 ‘교주(敎主)’와도 같은 존재다.

그런 잡스가 직접 무대에 올라 환상적인 말솜씨로 신제품을 소개하는 ‘맥월드 콘퍼런스&엑스포’는 애플 정키들 사이에서 꼭 한 번은 직접 가 두 눈으로 봐야 하는 ‘성지 순례’ 코스로 여겨졌다. 메카를 찾는 이슬람교도들처럼.

하지만 올해 행사를 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지난해 12월, 애플 정키들에게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애플사가 다음부터 맥월드에 참가하지 않으며, 이번 맥월드에 잡스의 기조연설도 없다는 소식이었다.

애플 정키들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맥루머’에 모여 그들이 기대했던 ‘아이폰 나노’의 예상 도면을 올리는가 하면, 잡스가 깜짝 등장할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맥월드가 열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6일 찾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맥월드 2009’ 현장에는 잡스도, 아이폰 나노도 없었다.

매년 기조연설 관람을 위해 전날 밤부터 길게 줄을 서던 팬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건물 주변 곳곳에 놓인 ‘여기서부터 줄을 서세요(This is your keynote line)’라는 안내 팻말이 민망해 보일 정도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미디어 및 업계 거물들이 대기하는 내부 공간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들어설 틈이 없었다는 행사장 입구에는 일부 기자들이 여유 있게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앉아 있었다. CNN과 NBC 등 미국 메이저 방송사 카메라와 조명으로 번쩍이던 로비도 올해는 작은 캠코더들만이 자리를 대신했다.

이런 참혹하리만큼 ‘썰렁한’ 광경에 대해 애플의 한 직원은 이렇게 정리했다.

“스티브 잡스의 빈자리인 거죠.”

○ 맥월드의 연인, 스티브 잡스

맥월드는 매킨토시(맥) 컴퓨터 사용자들이 컴퓨터를 사고팔기 위해 198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선 아직까지 ‘맥도날드 월드’ 혹은 화장품 ‘맥’의 전시회로 오해받는 낯선 이름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비슷한 시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만큼이나 인기가 높아졌다.

마니아들만의 잔치가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어우러지는 세계적 축제로 거듭나기까지는 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CEO)의 역할이 가장 컸다.

잡스는 1997년부터 11년간 맥월드의 기조연설을 맡아 그 해 애플 신제품과 경영 전략 등을 발표해 왔다. 그의 기조연설(키노트)은 그간 이른바 ‘스티브 노트’로 불리며 맥월드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는 키노트에 주로 진한 남색 배경화면에 긴 글 대신 제품 이미지와 간단한 문구만을 주로 활용한다. 중간 중간 깜짝 쇼도 잊지 않아 2시간짜리 프레젠테이션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우 노아 와일스가 잡스의 ‘교복’이나 다름없는 검은색 맨투맨에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채 등장해 “정말 멋지지 않겠어요?(Wouldn't it be great?)”라며 잡스의 성대모사를 하는 영상은 10년 넘게 인터넷에서 인기다.

잡스는 2005년에는 입고 있던 리바이스 청바지의 동전 주머니에서 ‘아이팟 나노’를 꺼내 작은 크기를 강조하는가하면, 2007년에는 ‘아이폰’의 무선인터넷을 활용해 즉석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실제로 배달시키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얇은 종이 서류 봉투에서 슬림 노트북 ‘맥북 에어’를 꺼내는 방식으로 다시 한 번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잡스 식(式) 프레젠테이션은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몰이를 해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스티브 잡스의 공감영어’ 등 여러 권의 책이 출판되기도 했다.

깜짝 쇼가 그의 비법의 전부는 아니다.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연습벌레로도 유명하다.

그는 매년 맥월드를 앞두고 2주 가량을 연습에 투자하며 최종 리허설도 3번 이상 직접 진행한다. 본사에는 그의 키노트 준비만 담당하는 전담 팀이 따로 있다. 이 팀은 매년 맥월드가 끝나고 나면 단체로 앓아눕는다고 알려져 있다.

‘교주’ 스티브 잡스도 없고… ‘신종 바이러스’도 없고…

○ 굿바이 미스터 잡스

올해도 어김없이 ‘섹시한’ 잡스 키노트를 기대했던 팬들에게 애플은 “전시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신제품을 공개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짤막한 이유만을 내놨다. 이를 두고 온라인에서는 즉각 잡스의 건강이상설 등 각종 루머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잡스는 다른 어떤 해명도 없이 “휴가를 떠났다”는 공식 서한만 남긴 채 끝내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행사 당일 모스콘 센터에서는 잡스의 팬들이 ‘스티브 잡스를 데려와라(Bring Back Steve Jobs)’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전단지를 길거리에 뿌리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지난해에 비해 참가자 수나 언론의 관심이 현저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맥월드 주최사인 IDG 측은 정확한 집계를 다음 달 마칠 예정) 애플의 마지막 키노트는 필립 실러 총괄 부사장이 맡았다.

잡스와 유사한 푸른 남방에 청바지의 캐주얼한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그는 예상 밖으로 여유 있는 태도와 목소리로 청중의 박수를 유도해냈다.

올해로 세 번째 맥월드를 관람한다는 한 참가자는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에는 당연히 못 미치지만 그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한 것 같다”며 “솔직히 기대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애플 관계자는 “제품을 총괄하는 임원급 이상만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다는 사내(社內) 규정 때문에 임원들은 평상시에도 매일같이 프레젠테이션을 연습한다”며 “실러 부사장도 프레젠테이션에는 익숙하다”고 덧붙였다.

○ 조용한 맥월드 2009… 눈에 띄는 뉴스 없어

올해 맥월드는 잡스의 공백 때문인지 크게 눈에 띄는 신제품은 없었다.

실러 부사장은 기조연설에서 “지난해 세계 곳곳에서 970만 대의 맥이 팔려 애플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며 “올해도 ‘맥의 해’로 만들기 위해 맥 관련 신제품들을 준비했다”고 소개했다.

이날 애플이 발표한 신제품은 친환경 노트북 ‘17인치 맥북 프로’와 ‘아이라이프(iLife)’ ‘아이워크(iWork)’ 등 맥 전용 소프트웨어의 2009년 버전으로, 기존 제품들을 업그레이드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맥 컴퓨터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미국에서조차 신제품보다도 아이튠스가 디지털 음원의 저작권 보호장치를 단계적으로 풀기로 했다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한편 애플 마니아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자랑할 만한 신제품이 없어 잡스가 직접 나서지 않은 것’, ‘조만간 애플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열고 깜짝 놀랄 만한 하드웨어 제품을 공개할 것’ 등 각종 추측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토니 리 애플 아시아태평양 마케팅 총괄 임원은 “애플은 이제 굳이 맥월드 기간에 맞추지 않아도 효과적으로 신제품을 발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일 뿐”이라며 “앞으로는 행사에 구애받지 않고 본사에서 주최하는 오프라인 행사나 인터넷을 통해 신제품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또 “애플은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만큼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간 아이라이프와 아이워크 등에 많은 투자를 해왔다”며 “당분간은 올해 맥월드에서 발표한 신제품 마케팅에 주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맥월드 이틀간 가장 눈에 띄는 이벤트는 실러의 키노트 마지막에 깜짝 출연한 가수 토니 베넷의 즉석 재즈 무대였다.

이날 베넷은 맥월드를 떠나는 애플의 마음을 담은 듯한(?) ‘아이 레프트 마이 하트 인 샌프란시스코(I Left My Heart in San Fransisco)’를 라이브로 불러 청중에게서 기립박수를 받았다.

글=샌프란시스코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디자인=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애플, 디자인의 성공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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