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인문학, 희망의 창을 열다

  • 입력 2009년 1월 10일 03시 04분


소외층 인문학 강좌

강사들 체험기록 정리

“그들과 세상, 벽은 없었다”

◇행복한 인문학/임철우 외 지음/271쪽·1만2000원·이매진

‘이것으로 나의 공부는 땡인가? 아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잠재력 속에 무한한 지식의 능력이 감추어 있었다는 것을 글쓰기 연습을 하면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글쓰기를 하려니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실뭉치에서 실이 풀어져 나오듯이 더 좋은 생각, 더 좋은 단어, 더 좋은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려지는 것이다.’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에서 자활근로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에 참가했던 수강생이 남긴 글이다. 그는 “인문학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알게 됐다”고 썼다.

노숙인, 자활근로자, 교도소 수감자 등 소외 계층을 위한 인문학 강좌가 국내에서 본격화된 것은 2005년 성프란시스대학이 노숙인 대상 인문학 강좌를 열면서부터다. 이후 곳곳에서 비슷한 강좌가 개설됐다. 이 책은 각 지역의 인문학 강좌를 담당한 문인, 철학자, 역사학자들이 강의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을 기록한 책이다.

소설가 임철우 씨는 처음 강의 요청을 받고 회의적이었다고 털어놨다.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그 사람들을 돈이 아닌 교육을 통해서, 그것도 하필이면 세상에서 쓸모없는 학문이라고 천대받는 인문학의 힘을 빌려서 감히 치유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2006년 여름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그의 우려는 깨끗이 사라졌다. 수강생들은 문학 작품을 놓고 거침없이 발언에 나섰고, 대학생들보다 더 뜨거운 토론 열기를 보였다. 시를 낭독하는 시간에는 경쟁하듯 최선을 다해 낭송 솜씨를 뽐냈다. 임 씨는 “나와 그 사람들 사이에 벽은 없었다. 내가 관념으로 쌓아올린 벽이었을 뿐이다”고 털어놨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씨는 의정부교도소 수감자들에게 ‘문학으로 세상읽기’를 가르쳤다. 수감자들의 수업 태도는 진지했다. ‘풀이 눕는다’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시 ‘풀’을 강의하던 날 한 수감자는 “이 시는 폭력에 굴복해 가는 한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시다. 폭력에 순치돼 노예 상태에 빠져 ‘알아서 기는’ 상태를 보여 준다”는 색다른 해석을 내놔 이 씨를 놀라게 했다.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인문학을 통해 삶 자체에서 스스로의 내적인 힘으로 획득하는 행복한 삶은 가능할 것인가’라고 생각했던 문학평론가 고영직 씨의 의문에 수강생들은 달라진 생활 태도로 대답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리던 수강생이 밝은 웃음을 찾았고, 또 다른 수강생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갖게 됐고, 알코올의존자였던 어떤 이는 금주를 하면서 본인의 경험을 살려 금주 상담자를 자처했다.

한 수강생은 “5년간의 군대 생활의 상처가 6개월간의 인문학 교육으로 해소됐다”고 털어놨다. 노숙인을 거쳐 자활기관에 다니고 있는 그는 5·18민주화운동 때 진압군 중대장이었고, 삼청교육대 대대장을 지낸 이력 때문에 사람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를 늘 가슴에 품고 있었는데 인문학 강좌를 통해 털어버렸다는 것이다.

59세의 한 수강생은 시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는 오전 3시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시집을 집어 들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서점에서 시집을 사기도 했다.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 수필가 양훈도 씨는 “이분들이 그리웠던 건 고급 인문학 지식이 아니라 일상에서 잠시나마 빠져나와 삶을 성찰하고 서로를 위로해 주는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맞춤법도 완벽하지 않은 한 수강생이 쓴 글을 보면 인문학이 가진 ‘치유’의 힘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나는 요지움에 들어 학교을 가은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은 것 같다. 성프란시스 대학병원에…. 잊혀지고 버려지고 외곡된 모던 것들이… 새롭게 환희로 덮쳐온다. 한번도 보지도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 엄청난 파고로 밀려온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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