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인생에 ‘첫눈 조심’ 표지판이 있다면…

  • 입력 2009년 1월 10일 03시 04분


◇첫눈/이순원 지음/296쪽·1만 원/뿔

이순원씨 6년만에 새 소설집

오늘의 자화상 사실적 묘사

이순원 작가의 소설에서 세상은 빈틈없이 현실적이다. 삶은 누군가 거스르고 싶다고 멈추거나 되돌려지지도 않는다. 어린 자식들이 장성하면 부모는 늙고 병든다. 도시로 사람들이 밀려들수록 고향마을은 폐가처럼 황량해진다. 하지만 그런 삶 위에도 우연과 신비함, 연민 같은 것들이 살포시 얹혀 있다. ‘찍으면 발자국 자리도 안 나게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는’ 첫눈의 느낌처럼 아련하고 또 어렴풋한 것들이다.

6년 만에 펴낸 새 소설집에서 작가는 이 시대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이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가족 간의 불화, 동남아 원정결혼, 기러기 아빠, 소모적인 이념 대립 등 우리 사회에서 더는 낯설지 않은 갖가지 병폐들은 소설 속 다양한 상징들과 어울리면서 새로운 이야기로 직조된다.

‘거미의 집’에서 형제들은 늙은 어머니의 거취 문제를 놓고 설전을 벌인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어서 안 된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있어 안 된다, 처가살이를 해 곤란하다 등 핑계거리가 오가는 가운데 큰며느리는 ‘4∼6개월간 각 집에서 공평히 돌아가며 모시자’는 기발한(?) 의견을 낸다. 이들의 대화를 엿들은 노모는 몰래 집을 떠난다. 노모는 살을 파먹으며 자라는 새끼들을 위해 바싹 마른 껍질만 남기고 사라지는 어미 거미와 같다.

농촌에서 횡행하는 베트남 원정결혼을 다룬 ‘미안해요, 호 아저씨’에서는 원정결혼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초등학교 동문회 겸 체육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시골 고향으로 내려간 주인공은 중국 옌볜에 이어 동남아에서까지 신부를 구해온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 안타까움은 동창들을 통해 ‘구매’에 가까운 베트남 원정결혼의 실상에 대해 들으면서 미안함으로 바뀐다. 꿈, 소망, 그리움 같은 것들이 돈 때문에 무자비하게 일그러지는 그들의 현실과 좀 더 잘 산다는 이유로 그런 폭력이 공공연히 정당화되는 이 사회의 자화상에 대한 반성 때문이다.

소설은 이런 현실 인식 아래 인연의 오묘함과 불가해한 우연들을 함께 얽어낸다. ‘카프카의 연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벌레’가 되는 지지부진한 이념 대립의 현실을 정체불명의 여인으로부터 온 메일,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과 연계해 풀어낸다. ‘멀리 있는 사람’은 명어머니(명을 길게 하기 위해 둔 대모)의 죽음이란 토속적 소재를 바탕으로 이제껏 삶의 고비마다 주인공을 지켜준 보이지 않는 우연의 정체를 보여준다.

특히 스쳐 지나간 애틋한 여인을 추억하는 주인공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난 아내의 말을 떠올리는 ‘첫눈’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묘미를 잘 표현해준다.

“늦가을에 강릉 가다 보면 진부에서부터 대관령까지 ‘첫눈 조심’이란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잖아. 그 얘기를 했더니 여기 사람들이 다 안 믿어.…정말 그런 표지판이 있다면 그건 시(詩)지 교통 표지판이 아니라는 거야.”

삶은 때로 ‘시(詩)적인 교통표지판’처럼 평범하면서도 신비롭기 때문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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