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김종학 ‘설악의 사계’ 전… 이대원 3주기 展

  • 입력 2008년 12월 2일 02시 51분


꽃을 품다… 희망을 뿜어내다

영락없는 촌로 차림새다. 검정 털신에 물감이 얼룩덜룩 묻은 코르덴바지, 낡은 체크 남방. 울산바위를 지나 강원 속초시 설악동 입구에 자리한 반지하 작업실에서 걸어 나오는 ‘설악의 화가’ 김종학(71) 화백의 첫인상은 소박했다. 한데 화가의 내면풍경을 녹여낸 그림은 딴판이다. 뜨거운 열기로 펄펄 끓는다. 더욱 실해지고 한층 강렬해진 꽃들. 여기에 새, 폭포와 나무들이 흥겹게 어울린 거대한 캔버스에서 생명의 약동과 분출이 느껴진다. 한구석에 잠자리를 포획한 거미가 보인다. 모든 생명에게 있어 사는 일은 전쟁임을 일깨워주듯.

#마음으로 빚은 자연

김 화백이 붓으로 완성한 ‘설악의 사계’가 12일부터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02-542-5543)으로 옮겨온다. 이글거리는 듯한 노란 태양을 마주한 맨드라미꽃에서 환희가 일렁이고, 흰 눈에 쌓여 벗은 몸을 드러낸 산은 강건하다. 하나하나 그림마다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 나온다. 칠순 화가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거침없는 붓 터치와 간결하고 추상화된 구성, 정물과 누드 등의 다양한 소재 등. 모두 그가 한곳에 머물지 않는, 현재진행형 화가임을 증명한다.

화가는 삶의 무게 아래 휘청거렸던 27년 전 이곳으로 왔다. 추상의 세계에 몰두했던 그는 고독과 씨름하면서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에 눈뜬다. 설악의 변화무쌍한 자연은 화가에게 희망의 말을 건네고, 위안의 따스한 손길을 내밀었다. 꽃을 그리기 시작했고 차츰 추상적 구상으로 방향을 돌렸다. ‘저놈 타락했다’ 소리에도 개의치 않았다. 팔기 위한 그림을 선택한 게 아니라, 화단이든 평단이든 남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결심한 것이기에.

“세잔은 자연은 화가에게 백과사전이라고 말했다. 작업실 근처를 날마다 산책하지만 몇 년간 보지 못했던 꽃이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지루할 새가 없다. 조그만 놈, 큰 놈. 가는 길에 마주친 꽃 때문에 눈 재미가 쏠쏠하다.”

자연을 마음에 품었다 눈부신 색채로 재해석한 설악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그 안에서 힘찬 생명의 교향악이 울려 퍼진다. 보는 이의 메마른 가슴에도 어느덧 온기가 차오른다.

#마음의 눈을 열어주는 자연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눈과 마음에 불이 반짝 들어온다. 야트막한 언덕에 꽃핀 사과나무를 비롯한 평범한 야산과 농원을 담은 그림들. 새로울 것 없는 풍경임에도 황홀하게 눈부시다.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과 함께 한국적 구상의 명맥을 잇는 작가로 손꼽히는 ‘농원의 화가’ 이대원의 3주기전이 열리는 갤러리 현대 강남(14일까지·02-519-0800)에서 만난 작품들.

화가는 말했다. “늘 같은 것을 보아도 화가의 눈에는 항상 다르게 보인다.” 그의 말처럼 화가의 붓을 빌려 소박한 과수원과 야산이 보석처럼 특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한 줌의 흙, 한 포기 풀과 한 그루 나무에도 깊이 녹아 있는 전통적 미의식, 힘차고 자유로운 붓놀림과 원색의 점묘기법은 우리의 자연을 이상향으로 되살려냈다. 설명이 따로 필요 없는 순하고 편안한 그림들.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조금씩 힘이 솟는 것 같다.

세밑이다. 불안한 걸음으로 내달렸던 한 해가 다시 속절없이 저물고 있다. 날씨도, 경제 사정도 춥다. 어지러운 가슴 한편에 허전함이 밀려든다. 무딘 눈으로 지나쳤던 자연의 넉넉한 품과 사랑을 일깨우는 그림 속에서 지친 영혼이 잠시 쉬어갈 틈을 찾아본다. 작은 것이라도 나를 위한 격려와 위안이 필요할 때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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