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일본에 잠시 끓고 말기

  • 입력 2008년 7월 16일 19시 53분


미타라이 후지오 일본 경단련(經團連) 회장은 2003년 캐논 사장 시절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삼성과 LG를 보면 대단한 활력이 느껴진다”며 일본 기업이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그 말고도 일본의 많은 재계 인사가 삼성의 성공에 찬사를 보냈다. 그럴 때면 “한국은 아직 멀었다”고 손사래 치면서도 속으론 우쭐했다. 삼성 브랜드는 일본 소비자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제법 있는 편이다.

하지만 도쿄의 대형 가전양판점을 찾을 때마다 자부심은 자괴감으로 바뀌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가전제품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처박혀 있고, 그나마 일제의 절반에 가까운 값에도 잘 팔리지 않았다. 결국 삼성전자의 가전 부문은 지난해 일본 시장에서 철수했다. 일본 사람들의 칭찬은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크다. 설령 진심이 담겼더라도 절반쯤 에누리해 듣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일(對日) 무역역조가 새삼스럽지 않다. 올해 상반기 대일 무역적자는 171억 달러다. 연간으로는 300억 달러를 넘겨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할 것이 확실시된다. 역대 정권이 무역적자 축소를 다짐했지만 적자는 불어나기만 했다.

일본 재계 인사들은 부품소재 산업의 한국 투자를 늘려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한다. 그러면 한국의 정치인과 관료는 큰 선물이라도 받은 양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구체적으로 투자가 어떤 업종에서 얼마나 성사됐는지,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에 대해선 누구도 챙기지 않는다. 그 사이 일제 자동차는 슬금슬금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한국이 미국을 의식해 자동차시장을 개방한 덕을 일본이 보고 있는 것이다. 총론은 그럴싸하지만 각론엔 약한 한국의 고질병이 낳은 비극이다.

일본 정부는 우군(友軍) 만들기에도 단수가 높다. 문부과학성은 자국에 우호적인 지식인을 양성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의 유학생들에게 넉넉한 장학금과 쾌적한 숙소를 제공한다. 유학생들은 일본 관련 분쟁이 일어나면 국제무대에서 일본 측 논리를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 단순히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정부는 독도 수호의 책무를 반크(VANK)나 가수 김장훈 씨 같은 젊은이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맡기고 방관했던 것은 아닌가.

3년 전 한일 양국이 교과서 왜곡 문제로 충돌했을 때 나카야마 나리아키 당시 문부과학상은 “교과서 학습지도요령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외교당국은 발등의 불이었던 후소샤(扶桑社) 교과서 왜곡을 때리는 데만 골몰했을 뿐 몇 년 뒤 더 큰 재앙을 일으킬 ‘나카야마 도발’엔 대비하지 못했다. 일본은 왜곡의 수위를 높일 발판을 마련했는데도 우리는 불씨를 보고도 덮어 버린 셈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불과 몇 달을 내다보지 못하고 ‘동북아 역사문제 대책팀’을 3월에 해체했다.

이웃에게 뒤통수를 맞으면 화 한번 크게 낸 뒤 넋 놓고 있다가 3년 뒤 같은 꼴을 당하는 것이 우리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돈 안 드는 생색엔 후하되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실속을 철저히 챙기는 것이 일본식 셈법이다. 잠시 끓고 마는 식으로는 경제 영토 역사 문제에서 판판이 깨질 수밖에 없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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