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배낭 속 친구가 되어주는 책 30선]<10>열하일기

  • 입력 2008년 7월 4일 02시 58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고미숙 지음/그린비

《“내가 여행에 대해 냉소적인 이유는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파노라마식 관계’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파노라마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의 퍼레이드다. 거기에는 그 공간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얼굴과 액션(action)이 지워져 있다. 또, 그때 풍경은 자연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생명의 거친 호흡과 약동이 생략된 ‘침묵의 소묘’일 따름이다. 이런 구도에선 오직 주체의 나른한 시선만이 특권적 지위를 확보한다. 시선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대상은 전적으로 거기에 종속될 뿐.”》

연암과 떠나는 사유와 탐색의 여행

1780년 여름, 조선의 선비 연암 박지원의 여행은 어땠을까. 연암은 사촌형을 따라 청나라 황제 고종의 칠순잔치에 가는 사절단과 함께 압록강을 건넌다. 중국으로 가는 여행길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연암은 이 여행에서 온갖 이질적인 것과 적극적으로 접속한다. 수행원의 감시를 따돌리고 장사치들과 몰래 만나는가 하면, 비밀 지하조직과 접선하듯 팽팽한 긴장 속에서 청의 재야 선비들과 만나 필담을 나눈다. 공식 사절단이 아닌 그는 끊임없이 대열에서 이탈해 금기를 건드리고 낯선 문화의 심층을 탐색한다. 여행 후 연암은 여행기 ‘열하일기’를 썼다.

고전평론가인 저자 고미숙 씨는 ‘열하일기’를 프랑스 현대 철학자인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사상을 바탕으로 다시 읽어냈다. 저자는 ‘열하일기’에 담긴 연암의 여행이 이질적인 사유들이 충돌하는 장쾌한 편력이자 대장정이었다고 본다. 파노라마적 관광도 아니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도 아닌 머묾과 떠남에 자유로웠던 ‘유목’이었다는 것.

저자에 따르면 연암이 여행길에서 만나는 대상은 단순히 풍경에 머물지 않는다. 반대로 연암은 중국인의 눈을 통해 조선의 문화나 습속을 바라봄으로써 익숙한 것들을 돌연 ‘낯설게’ 만들어 버린다. 열하일기에는 조선 사신들의 화려한 의관을 보고 청나라 사람들이 ‘저 중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고 궁금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도포, 갓과 띠가 당시 중국의 승복과 흡사했던 것. 연암은 조선의 의관이 신라의 것을 따른 것이 많았고, 불교를 숭상했던 신라는 중국 승복을 본뜬 까닭에 1000 년이 지난 당시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유교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던 조선의 유학자들이 정작 ‘패션’은 1000 년 전 불교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 이처럼 연암에게 여행은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여행작가 조창완 씨는 “죽어 있는 텍스트가 아닌 살아 있는 고전을 만날 수 있다. 여행을 단순한 소비가 아닌 자기 변화의 시기로 만들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저자는 ‘열하일기’ 자체가 담고 있는 연암의 사물에 대한 강한 호기심과 풍부한 유머, 그리고 통렬한 패러독스를 보여주려 한다. ‘탈주’ ‘재영토화’ ‘재배치’ 등 철학 용어가 낯설다고 해도 책은 쉽게 읽힌다. 저자는 철학적 개념을 구체적인 ‘열하일기’의 구절을 통해 쉽게 풀어냈다.

저자는 도시인들이 보는 전원, 동양인의 눈에 비친 서구, 서구가 발견한 동양 등은 모두 외부자가 낯선 땅을 ‘흘깃’ 바라보고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본다. 반대로 진정한 여행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찐한’ 접속이고, 침묵하고 있던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견의 현장이며, 새로운 담론이 펼쳐지는 경이의 장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