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아집의 블랙홀…‘블랙홀 이야기’

  • 입력 2008년 3월 15일 02시 49분


◇블랙홀 이야기/아서 I 밀러 지음·안인희 옮김/540쪽·2만5000원·푸른숲

1935년 1월 11일 오후 6시 15분.

스물네 살 청년은 가슴이 뛰었다. 영국천문학회 발표장. 어린 시절부터 이날을 꿈꿨다. 기존 과학계 학설을 뒤집는 발견. ‘블랙홀’의 존재를 증명한 성과가 빛을 보는 자리였다.

하지만 흥분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4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뒤를 이어 단상에 오른 당대 최고의 천체물리학자는 청년의 이론을 “헛소리”라 치부했다. 그 한마디. 우주 과학은 40년 이상 답보 상태에 빠진다.

이 청년과 당대 최고의 거물 천체물리학자는 바로 인도의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1910∼1995)와 영국학자 아서 스탠리 에딩턴(1882∼1944). ‘블랙홀 이야기’는 위대한 두 천체물리학자의 ‘별의 죽음에 관한 논쟁’ 이야기다.

찬드라세카르가 블랙홀 이론(실제로 블랙홀이란 용어가 사용된 건 1967년 이후)을 내놓은 시대에는 별의 최후는 모두 ‘하얀 난쟁이별’일 것으로 믿었다. 여기서 별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만 뜻한다. 빛을 다한 별은 폭발해 사라지거나 오그라들어 ‘불활성(不活性)을 띤 돌덩이’가 된다는 것이다. 에딩턴은 이 우주관을 대표하는 대부(godfather)였다.

하지만 찬드라세카르의 ‘찬란한 영감’은 ‘또 다른 죽음’의 방식을 알아챘다. 태양 질량의 약 1.4배가 넘는 별은 연료를 다 태워도 하얀 난쟁이별이 되지 않고 붕괴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몸짓만큼의 중력 때문이다.

외부로 뿜어내는 힘인 빛과 균형을 이루던 중력의 과잉으로 별은 응축을 거듭하다 열량을 내부에서 폭발시킨다. 이 ‘초신성 폭발’ 뒤에 남는 알맹이(core)가 ‘중성자별’이다.

그리고 중성자별이 되기에도 너무 큰 알맹이가 남는 경우가 있다. 자체 중력으로 또다시 무한 붕괴하는 별. 부피는 제로지만 엄청난 질량으로 무시무시한 중력을 가진 죽은 별. 바로 블랙홀이다.

영국 런던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인 저자에게 에딩턴이 찬드라세카르를 깨부순 이 사건은 난센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떤 원칙이나 기준이 없는 ‘딴죽걸기’였다. 도대체 당대에 추앙받는 과학자가 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그 속에는 전통과 혁신의 대립을 넘는 세계관의 충돌이 숨어 있다.

‘블랙홀 이야기’는 독특한 구조를 띤다. 블랙홀에 관한 해설서이자 과학이 뜨겁게 꽃피던 20세기 과학사(史)이다. 또한 결국 말년에 공로를 인정받고 198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찬드라세카르의 전기이며,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에딩턴의 삶도 추적한다. 이 모든 게 뒤엉켜 종착을 향해 간다. 책의 얼개 자체가 휘몰아치는 블랙홀인 셈이다.

복잡한 과학서임에도 이야기 전개는 흥미진진하다. 저자의 세련된 필치는 소설을 읽는 듯한 즐거움을 안겨 준다. 이는 저자가 블랙홀을 통해 ‘과학과 인간 사회의 관계’라는 시대적 화두를 던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블랙홀은 단순한 21세기 기초과학의 열쇠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이치를 깨달으면 다른 이치도 깨닫는다고 했던가. 세상을 아우르는 이치가 블랙홀에는 들어 있다. 원제 ‘Empire of the Stars’(2005년).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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