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 병자호란 - 6·25까지 견뎠는데…

  • 입력 2008년 2월 12일 02시 57분


화재 원인 조사 경찰과 소방당국 관계자들이 11일 숭례문의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해 현장을 촬영하면서 감식작업을 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화재 원인 조사 경찰과 소방당국 관계자들이 11일 숭례문의 화재 원인을 밝히기 위해 현장을 촬영하면서 감식작업을 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숭례문 ‘610년 역사’ 5시간 만에 한줌 잿더미로

1398년 조선의 수도 한양의 도성 정문으로 창건된 이래 610년 동안 이 땅의 한복판을 지켜온 국보 1호 숭례문.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 그 숱한 영욕의 역사 속에서도 큰 피해 없이 원래 모습을 온전히 지켜왔던 숭례문이었지만 이번 화재는 불과 5시간 만에 숭례문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조선시대 숭례문의 대표적인 수난은 역시 임진왜란이었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은 숭례문을 통해 한양으로 입성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게 숭례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치욕이었지만 별다른 피해는 보지 않았다. 또한 병자호란 당시에도 특별한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일제 침략이 가속화하고 국권을 상실해 가던 20세기, 숭례문의 수난은 계속됐다. 1907년 일본 왕자 요시히토(嘉仁)는 서울을 방문해 “일본의 왕자가 약소국 조선의 도성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치욕”이라면서 숭례문 좌우의 성벽을 헐어내고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숭례문 좌우 성벽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950년 6·25전쟁도 절박한 위협이었다. 당시 숭례문은 전쟁의 와중에서 총탄을 맞기도 했으나 폭격이나 화재와 같은 큰 피해는 모면할 수 있었다. 광화문이 폭격으로 파괴되는 상황이었기에 숭례문의 ‘생존’은 더더욱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2002년엔 숭례문의 석재가 떨어져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석축 가운데에 위치한 홍예문(虹霓門·무지개 모양의 문) 상단부의 석재 일부가 오랜 세월과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탈락한 것이다. 하지만 초강력 에폭시 수지 접착제를 이용해 떨어진 석재를 원위치에 다시 붙여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숭례문은 이렇게 온갖 수난을 겪어왔다. 그러나 숱한 수난 속에서도 숭례문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유지해 왔다.

그 숭례문의 역사가 순식간에 불에 타 사라져 버렸다. 국보 1호가 불타는 21세기 대한민국. 숭례문 610년 역사에 있어 최대의 치욕이 아닐 수 없다.


▲ 영상취재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 영상취재 : 정영준,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어처구니’ 없어져 어처구니없는 일이?

작년 추녀끝 ‘잡상’ 사라져… 속설이 사실로▼

0일 밤 전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숭례문 화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말이 언론을 통해 나오면서 궁궐 건축물 추녀마루의 잡상(雜像)을 일컫는 ‘어처구니’(사진)가 새삼 회자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어처구니는 ‘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이란 뜻. 하지만 속설에 따르면 어처구니는 잡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잡상은 진흙으로 빚어 만든 토우로, 추녀마루 가장 바깥부터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등이 차례로 앉아 있다.

잡상은 조선시대 도성과 궁궐 건축물에만 나타난다. 잡상은 하늘에 떠도는 잡귀를 물리쳐 건물을 지킨다고 한다.

지난해 숭례문의 잡상 하나가 떨어져 나간 사실이 확인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어처구니’가 새삼 회자되는 건 화마에 스러진 숭례문을 보며 잡귀를 물리치는 어처구니(잡상)도 사라짐을 떠올린 안타까움의 반영일 듯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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