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초연 71년 만에 복원 포킨의 발레 ‘춘향’ 연습 현장

  • 입력 2007년 10월 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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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발레의 창시자’로 꼽히는 세계적 안무가 미하일 포킨(1880∼1942)의 발레 ‘춘향’이 초연 71년 만에 복원돼 마침내 국내 무대에 오른다. 본보와 국립발레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이 작품은 1936년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됐던 포킨의 ‘춘향’(당시 제목은 사랑의 시련·L’epreuve d’Amour)을 오리지널 안무 그대로 되살려 낸 역사적인 복원 공연이다. 31일∼11월 3일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인 국립발레단 연습실을 찾았다.》

“자, 원숭이들 나오세요.”

1일 오후 3시. 경쾌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이 발레의 시작과 끝 부분에 등장하는 장난스러운 캐릭터인 원숭이 6마리가 연습실 한가운데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평소 무대 위에서 화려한 발레 테크닉을 선보이던 남자 무용수들이 원숭이로 변신해 팔을 땅에 질질 끌며 걸어 다니기도 하고 발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긁는 흉내를 내자 지켜보던 다른 단원들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코믹한 첫 장면부터 포킨의 ‘춘향’이 재미있고 발랄한 작품임을 짐작하게 했다. 이어 등장하는 춘향의 아버지 만다린. 내한한 안무 트레이너 아이리 하이니넨(65) 씨가 만다린이 걸어오는 장면을 먼저 선보인 뒤 이 역을 맡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신무섭 씨에게 따라 하도록 했다.

신 씨가 근엄하게 걸어오자 하이니넨 씨는 “이 작품은 유머러스한 장면이 많다”며 “만다린의 등장도 재미있게 묘사돼야 하는 대목(Supposed to be funny)”이라며 과장되게 심각한 척하며 걸어오는 연기를 반복해 시범을 보였다.

포킨의 ‘춘향’은 애절한 사랑을 다룬 원작과 달리 한바탕 유쾌한 소극(笑劇)이었다. 월매 대신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려는 춘향의 아버지인 관료(만다린)가 등장한다. 러시아의 일부 자료에는 이 작품 제목이 ‘사랑의 시련’이 아닌 ‘욕심쟁이 만다린(Greedy Mandarin)’으로 나와 있을 만큼 아버지의 비중이 크다. 가장 코믹한 연기를 하는 캐릭터는 변 사또에 해당하는 서방에서 온 대사.

마을 처녀들이 등장해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자 하이니넨 씨는 포킨의 오리지널 동작을 모두 꿰고 있는 듯 “서서 손을 내밀고 인사하는 게 아니라 손을 내밀면서 다가가라”는 등 동작의 아주 세세한 부분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이번 리허설을 통해 드러난 포킨의 안무 동작과 춤에는 중국적인 분위기가 많이 묻어나 있다. 박인자 국립발레단장은 “포킨은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을 ‘아시아의 어느 먼 나라’로 설정했는데 1930년대는 아시아 하면 으레 중국을 떠올렸던 시절인 만큼 중국 느낌이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며 “이번 공연은 포킨의 오리지널 안무를 그대로 복원하는 데 큰 무용사적 의미가 있는 만큼 춤 동작에서 중국적인 느낌이 강해도 원작 안무 그대로 공연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초연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야수파 화가 앙드레 드랭(1880∼1954)이 맡았던 중국풍의 무대와 의상은 우리 식으로 새로 제작된다. 무대는 오페라 ‘투란도트’ ‘보체크’ 등으로 호평을 받은 임일진 씨가 맡고 의상은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씨가 처음으로 발레 의상을 선보인다. 02-587-6181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안무 트레이너 하이니넨 씨 “거장의 유머감각도 살려냈습니다”▼

“포킨의 ‘춘향’은 1936년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초연된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공연되다가 1939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더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무대 의상이며 세트 등이 손실됐으니까요. 그 작품을 오리지널 안무 그대로 복원한다고 하니 매우 기쁘고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도 느낍니다.”

초연 이후 71년 만에 복원되는 미하일 포킨의 발레 ‘춘향’의 안무 트레이너를 맡아 내한한 아이리 하이니넨 씨는 “거장의 작품을 다시 복원하는(Revive) 작업을 맡게 돼 개인적으로도 큰 영광(Great Honor)”이라고 말했다.

하이니넨 씨는 포킨에 대한 저작권을 갖고 있는 미하일 포킨 재단의 추천으로 내한했다. 포킨 재단은 이번 한국 공연의 조건으로 ‘재단에서 위임하는 안무 트레이너를 고용할 것’을 내세웠다. 하이니넨 씨는 포킨의 ‘춘향’ 리허설 동영상을 토대로 국립발레단원들에게 한 장면씩 포킨의 안무를 지도하는 실질적인 복원 과정을 맡고 있다.

핀란드 헬싱키 태생인 하이니넨 씨는 발레 연출가이자 발레리나 출신의 무용 노테이터(Dance Notator·안무가의 안무를 무보 등을 통해 전문적으로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는 세계적 발레단인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에서 15년간 몸담았고 영국로열발레단, 캐나다국립발레단, 키로프발레단 등 수많은 발레단과 일했다.

핀란드국립발레단에서 발레리나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는 핀란드국립발레단이 포킨의 ‘춘향’을 리메이크한 ‘사랑의 시련’에 병사 역으로 직접 출연한 적도 있다. 이 작품에서는 병사 역을 발레리노 대신 발레리나가 맡는다.

그는 “핀란드국립발레단은 1956년 ‘사랑의 시련’을 처음 공연한 뒤 여러 차례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렸는데 이는 그만큼 당시 이 공연이 대중성이 있고 많이 사랑받았다는 의미”라고 기억했다.

이어 그는 “1936년에 초연된 포킨의 오리지널 버전과 핀란드국립발레단의 리메이크 버전은 약간 차이가 있다”고 했다.

“핀란드국립발레단의 ‘사랑의 시련’ 역시 포킨의 원안무에 충실한 리메이크 작품이긴 하지만 몇몇 동작과 장면은 달라요. 핀란드국립발레단 버전은 음악은 똑같지만 일부 동작을 빼서 포킨의 원작보다 길이도 약간 더 짧기도 하고요. 이번에 국립발레단이 무대에 올리는 작품은 포킨의 오리지널 안무를 고스란히 따라 온전히 복원합니다.”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작품의 성격에 대해 그는 “유머러스한 대목이 많아 관객들이 매우 즐겁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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