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실패는 신의 저주인가…‘실패의 향연’

  • 입력 2007년 9월 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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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이카로스의 추락’. 목가적인 풍경의 한 켠에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다. 이카로스는 한계를 넘으려다 추락한 근대적 실패자다. 들녘 제공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이카로스의 추락’. 목가적인 풍경의 한 켠에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다. 이카로스는 한계를 넘으려다 추락한 근대적 실패자다. 들녘 제공
◇실패의 향연/크리스티아네 취른트 지음·오승우 옮김/272쪽·1만3000원·들녘

독일어 ‘실패하다(scheitern·샤이터른)’는 ‘장작개비(Scheit)’에서 유래했다. 배가 침몰해 산산이 부서지고 남은 나무 조각. 난파에 대한 두려움이다. ‘샤이터른’에는 ‘쓰레기가 되다’란 뜻도 있다. 사람들이 얼마나 실패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는지 잘 보여 준다.

저자는 오늘날 실패는 ‘금기어’라고 말한다. 19세기 유럽에선 성(性)이 금기어였다. 머릿속으론 생각하지만 입 밖엔 내지 못했다. 금욕주의 뒷면엔 성도착 문화가 만연했다. 실패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패에 대해 입을 닫는 대신 남의 실패를 관음증 환자처럼 엿보고 떠벌린다. 또 실패는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는 성공의 과정으로만 등장한다.

실패를 감추고 성공 전략을 소개하는 책은 많다. 이 책은 성공 대신 실패를 얘기한다. 과거 예술가, 문인, 기업가들이 끔찍한 경험으로 형상화된 실패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되돌아본다. 그림, 신화, 문학, 고대 비극, 성공한 천재들의 실패 이야기가 펼쳐진다.

근대 이전에 실패는 어떤 개념이었을까. 돌고 도는 계절처럼 인간의 삶을 이미 정해진 주기적 순환으로 봤던 전근대 시절, 실패자는 이미 정해진 사회질서와 다른 삶을 산 자였다. 그는 사회에서 격리돼 도덕적 죗값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근대는 한계를 넘어서려는 도전의 시대다. 이 과정에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 실패였다.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그림 ‘이카로스의 추락’은 이런 실패 관념의 변화를 한눈에 보여 준다. 얼핏 보면 이 그림은 목가적이다.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간다. 목동은 하늘을 본다. 그러나 오른쪽을 잘 보면 다리와 손 하나만 보인 채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다. 비행(飛行)의 한계를 넘으려다 추락한 이카로스다. 곧 근대적 실패자다. 전근대적 삶의 전형인 농부와 목동은 이 실패를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것이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한 초기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살피는 것도 흥미롭다. 저자에 따르면 ‘로빈슨 크루소’는 모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 청교도들은 성공하면 신이 내 편이고 실패하면 신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크루소가 탄 배의 난파는 파산과 실패며, 섬에 고립된 운명은 죗값을 치르고 신에게 다시 구원받기 위한 과정이다.

‘성공의 어머니로서 실패’가 아니라 실패 그 자체에도 다양한 시각과 문화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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