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필리핀 굴욕의 근대사… ‘에르미따’

  • 입력 2007년 4월 28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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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따/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지음·부희령 옮김/504쪽·1만3000원·아시아

한국 독자에게 낯선 이름이지만 필리핀 작가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83)는 지한파다. 195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방한해 김은국 한무숙 씨 등 작가와 장준하 당시 사상계 주간 등과 친분을 나눴다.

이 작가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소설 ‘에르미따’는 주인공인 창녀의 이름이자 마닐라의 유명한 환락가 이름이다. 시대적 배경은 미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필리핀을 탈환한 1945년부터 개발 바람이 거셌던 1970년대까지. 이 시기는 부정부패로 얼룩진 필리핀의 현대사와 일치한다.

‘에르미따’는 암담한 필리핀의 현실과 정치적 전망에 대해 일관되게 발언한 작가의 문제의식이 오롯하게 살아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한 여성의 인생유전으로도 읽히지만, 한편으로는 필리핀 역사에 대한 거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부유한 로호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난 에르미따. 세상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을 때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제 발로 고급 요정을 찾아간다.

“매춘이 양심의 가책이나 도덕적 신념 없이, 생존 때문이 아니라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행위라면, 누가 진짜 매춘부일까요? 주위를 돌아보세요. 가면을 쓰고 인격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 대학에서 에르미따를 가르친 영문학 교수의 말이 곧 소설의 주제다. 생존을 위해 매춘을 시작한 에르미따가 만난 상원의원, 언론재벌, 장군 같은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인격자 노릇을 하는’ 이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필리핀 현대사를 더럽힌 장본인이다.

만나지 못한 어머니를 찾아 일본 도쿄로, 미국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로 몸을 옮기지만, 어렵게 만난 어머니는 에르미따의 존재를 부정한다. 서구 사회로부터 내쳐진 필리핀의 상징이기도 하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에르미따의 연인이 보낸 편지의 몇 구절은 필리핀의 역사적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다.

‘아름다운 조국이 내 민족에 의해 파괴되어 가고 있기에 나는 울고 있어.’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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