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4년 위안부할머니 전금화씨 별세

  • 입력 2007년 3월 1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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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죽어서나 편안하려나….”

열일곱 살부터 스물두 살까지, 꽃다운 젊음을 일본군들에게 짓밟혀야 했던 전금화 할머니. 그는 1994년 3월 12일 새벽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삶을 마감했다.

할머니는 1940년 동태잡이 하는 데 가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청진에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본군들은 처녀들을 칼로 위협하며 기차와 트럭에 태워 중국 헤이허(黑河)에 있던 일본군 위안소로 끌고 갔다.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우리를 돼지우리 같은 판잣집에 넣었다. 나는 처녀였는데 그곳에서 일본 군인에게 처음으로 당했다. 입을 틀어막고 덤벼드는 데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창피해서…. 그때 일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일본군 위안부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 검진을 받았다. 병에 걸린 것으로 판명되면 군인들은 더럽다며 나가라고 발로 차고 때렸다. 할머니는 생전에 남긴 증언에서 “성병 걸린 것이 어디 우리 잘못인가? 지네(일본군)들이 우리에게 옮긴 것”이라며 치를 떨었다.

“군인들이 삿쿠(콘돔)를 가지고 왔는데 그중에는 삿쿠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었다. 한 번 쓴 삿쿠는 방 안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 냄새 때문에 항상 메스껍고 구역질이 났다.”

할머니는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고향을 떠나 이름도 호적도 없이 살아야 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첫 고백 이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 이슈가 됐다. 전금화 할머니도 공개 증언에 나섰다. 전 할머니가 숨지고 1년여 후인 1995년 일본정부가 민간재단을 통해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에 나섰으나 대부분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위안부 여성에 대한 모욕”이라며 단호히 거부했다.

국내 위안부 피해 등록자 중 40∼50%는 이미 세상을 떴다. 종전 직후 강제동원 관련 서류들을 폐기 처분했던 일본은 이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사라질 때만 기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최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거는 없다”는 망언을 했다.

아시아계 여성들의 증언을 무시해 오던 일본 정부는 최근 미국 의회에 나온 네덜란드인 얀 뤼프 오헤르너(84) 할머니의 고발에 서방 언론의 관심이 쏠리자 당황하고 있다. 오헤르너 할머니는 “일본인들은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받아낼 때까지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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