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태웅]한국에서 연극인으로 산다는 것

  • 입력 2007년 3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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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이름 앞에는 늘 ‘123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 원작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아니 그 수식어가 나를 끌고 다닌다.

대중적 파급력과 관객 수를 비교하면 연극은 영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 호응하는 대중의 수가 곧 권력과 자본으로 연결되는 대중소비사회에서 이상한 현상도 아니다. 원작 연극이 흥행하면 ‘영화 덕에 연극도 나발 분다’고 한다.

나는 이제 연극판에서 ‘엄청난 자본을 축적한 흥행작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나처럼 실속 없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자로서 내가 받은 돈은 ‘1230만’이라는 수치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뿐인가. 나도 모르게 ‘왕의 남자’는 만화로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왕의 남자’ 원작이 연극 ‘이(爾)’라는 표기조차 안 돼 있다.

하지만 그나마 영화가 성공한 후 약간의 보너스를 받은 나는 사정이 낫다. 흥행성이 검증된 몇몇 상설공연을 논외로 하고 볼 때 대학로를 포함해 한국 땅에서 연극을 한다는 건 일종의 순교행위다. 무엇을 위한 순교인가? 영화를 위해서? 자기만족을 위해서? 나는 왜 연극을 계속하고 있나?

연극에는 뭔가가 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관객 수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가 있다. 나는 그것이 삶과 세계에 대한 성찰과 깨달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걸 문학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런데 문학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생겨난 이상한 현상이 하나 있다. 연극인들은 ‘문학성을 벗어나야 연극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문학계에서는 희곡을 문학으로 분류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역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 30% 이상이 희곡작가다. 그런데 한국의 문학상 가운데 수상자로 희곡작가를 선정하는 데는 단 한 곳밖에 없다. 문학 하면 으레 시와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일이다.

이래저래 점점 연극하기가 힘들어진다. 지원금을 받지 않은 극단은 공연할 엄두조차 못 낸다. “지원금이 곧 극단”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지원금을 받은 극단은 그 대부분을 극장 대관료로 지급해야 한다. 지원금은 제작비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고 입장 수입은 미미하다. 그러다 보니 공연 참가자의 개런티는 뒷전이 된다.

연극이 지닌 소중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한다’는 것은 곧 ‘망한다’와 등치된다. 그러니 누가 연극을 하겠는가? 배우 지망생은 뮤지컬을 선호하고 연극배우들은 영화판의 러브콜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끔 엉뚱한 생각이 든다. 그래, 언제는 연극판이 열악하지 않았던 적 있었나? 그래, 시련과 어려움이 밑천이야. 명작은 이렇게 일용한 번뇌와 고통 속에서 나왔던 것 아닌가? 그래, 계속하자.

연극의 3요소 중 하나인 관객, 즉 대중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반성’이라는 작품을 공연하고 있다. 가족사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를 조망하고 싶어서 쓴 작품이다. 근현대사 속에서 생산하고 노동하고 역사의 질곡을 짊어지며 살아온 대중의 모습을 어머니 속에 담고 싶었다. 어머니를 통해 역사 속 대중의 역할과 모순을 포착하고 싶었다. 나는 권위적 질서의 대변자인 아버지의 반성보다 대중적 태도의 대변자인 어머니의 반성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역사는 대중의 손에 달려 있다. 그들이 새 문화 창조의 어머니가 돼야 한다.

자발적 유희와 충동, 스스로 창출한 가치를 기준으로 움직일 때 새로운 역사가 가능하다. 그럴 때 대중이라는 말에 붙은 부정적 이미지가 사라질 것이다. 수십 년간 내면화된 허무와 냉소가 사라지고 진정한 문화가 꽃피는 축제의 시대를 기대한다.

김태웅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극단 우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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