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교수의 그림 읽기]누이의 수틀 속 꽃밭을 보듯

  • 입력 2007년 3월 10일 02시 59분


코멘트
그림=홍옥순, 아원공방 펴냄
그림=홍옥순, 아원공방 펴냄
삶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누군가 오래 못 본 얼굴이 보고 싶을 때, 그냥 하릴없이 어슬렁거리고 싶을 때, 봄이 좀 더디 온다 싶을 때 나는 인사동으로 갑니다. 60년 가까운 서울살이 가운데서 가장 정다운 거리가 인사동입니다.

사람들이 느긋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곳, 추녀가 나직한 가겟집 저 안에서 오래 묵은 골동품을 닮은 주인이 약간 무심한 미소로 맞아 주는 곳. 수많은 골목 어귀의 단골집 골방에 예술가 문인들을 위해 술상이 차려지는 곳. 그 인사동이 지금은 많이 변해 버렸습니다. 누군가 손을 대어 거리를 우중충한 빛으로 고쳐 놓은 다음부터 그 해묵은 정다움을 잃고 말았습니다. 새로 깔아 놓은 어두운 포도는 벌써 울퉁불퉁, 미련한 갓돌의 모서리가 가끔 정강이뼈를 공격합니다. 그윽하던 우리네 필방, 지물포, 골동품은 많이 줄고 국적 불명의 싸구려 잡동사니와 호떡 노점이 성시를 이룹니다.

그래도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공방이 하나. 조용한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여주인의 미소가 부드러운 조명 아래서 빛납니다. 여섯 자매가 장신구를 손수 만들어 진열해 놓고 번갈아 가게를 지킵니다. 만날 때마다 “셋째?” 하고 물으면 “아뇨, 넷째” 하고 대답하고 “그럼 저쪽은 언니?” 하고 물으면 “아뇨, 동생” 하고 대답합니다. 나는 매번 틀리게 짚지만 상관없습니다. 누구든 변함없이 그윽하고 나직한 웃음으로 맞아 줍니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아늑한 구석 자리로 안내 받아 녹차를 마시노라면 제주도에서 올라왔다는 철 이른 수선화 옆으로 주인이 작은 ‘선물’을 내밉니다. 탁상용 달력인데 제목이 ‘엄마의 바느질’입니다. 달마다 자매들의 늙으신 ‘엄마’가 수놓은 꽃과 새 그림이 찍혀 있습니다. 이 기술 복제시대에 마주친 수들이 마음을 흔듭니다. 아주 느리게 그러나 즐겁게 엄마의 바늘이 색실들을 데리고 그리움처럼 수틀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누이의 어깨 너머/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세상은 보자”고 미당은 노래했지요. 이 꽃샘추위가 지나가면 수틀 속 꽃밭 같은 봄이 오겠지요? “나란히 나란히 걸어갑시다 웃으며 갑시다” 엄마가 3월 달 그림 밑에 서툴러서 더 아름답고 정성스러운 글씨를 수놓았습니다. 엄마의 말씀처럼 다 같이 웃으며 걸어갑시다. 봄이 오시는 길목으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