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긴 밤 지세운 아침이슬…가수 조영남의 ‘맹갈이’김민기

  • 입력 2007년 3월 9일 19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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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 운운하는 글이 신문에 실렸을 때 가장 화를 낼 친구는 바로 김민기다. 그는 수틀리면 화를 낸다. 나는 그의 어린 아들한테 용돈을 건네줬다가 된통 혼난 적 있다. 돈 좀 있는 내 친구를 앞세워 화려한 술을 샀다가도 혼난 적 있다. 그가 화를 낼 땐 잠시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가 왜 벼락같이 화내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어설픈 돈 자랑이나 힘 자랑을 하는 인간을 싫어한다. 타협할 줄 모른다는 얘기다. 그만큼 바른 결을 타고 났다. 나는 이 날 이때까지 그처럼 결 좋은 인간을 만나본 적 없다.

몇 달 전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동숭동에서 만나 뮤지컬 한 편을 보고 큰 길가에 있는 학림다방 이층에 올라가 오전 한 시(?)경까지 술을 마셨다. 헤어질 때가 되어 강남행 택시의 뒷자리에 올라 탔다. 그런데 그가 아무말 없이 앞자리에 타는 게 아닌가. 나는 급해서 소리쳤다. "야! 맹갈아 (우리는 옛날부터 그를 맹갈이라고 불러왔다. 그냥 그렇게 불렀다.) 너는 집이 일산 방향이잖아. 나는 지금 강남으로 가는 거야. 너는 길 건너 가서 일산가는 택시를 잡아야지." 맹갈이가 답했다. "형, 알아. 알아. 그냥 가자구. 내가 강남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시 일산으로 가면 될 것 아냐. 걱정 말라구." 세상 어느 누가 김맹갈의 고집을 꺾을 수 있으랴. 우리는 그렇게 갔다. 나는 몇 차례 맹갈에게 물은 적 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지?"

우리는 첫 만남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본 적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내 기억엔 군대생활 막판에 그를 집중적으로 만났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그는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막 내놓은 서울대 미대 2년생이었다. 군부통치 시절이라 장발 파동, 대마초 파동, 금지곡 파동 등 온갖 우스꽝스런 일로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맹갈이와 나를 변함없이 묶어준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세상에 그 자처럼 술을 맛있게 마시는 인간이 또 있을까.

그는 삐쩍 말랐지만 남미 혁명가 체 게바라를 방불케 하는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3박 4일 논스톱으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나는 그 자에게 단 한 번 술을 적게 마시라는 소리해 본 적 없다.

누가 술 먹지 말라고 해서 안 먹을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나는 어차피 술 먹다 생을 마감할 녀석, 나중에 괜히 '어이구 살아있을 때 그렇게 좋아하고 술이나 실컷 사줄 걸' 하고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원 없이 술을 사주었다.

내가 미술로 가는 길을 터준 것도 사실은 김민기였다. 군대 시절 그를 만나러 동숭동 서울미대 캠퍼스로 가서 널려있는 미대생 실습작을 보며 '야, 이건 내가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보다 잘 그리겠다' 했을 때 그 자가 '읏핫핫핫' 웃으며 '형이 그려야 해. 우리보다 잘 그릴 거야' 하는 바람에 그 때부터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잔뜩 사 가지고 부대에 들어가 짬만 나면 그림을 그려 담았다. 그는 평소에 조용하다가도 한 번 냅다 웃으면 그 웃음소리가 임꺽정이나 장길산을 방불케 했다. 나는 늘 그의 티없는 웃음소리에서 한없이 곧은 결을 보곤 했다.

내가 주말 휴가를 나오면 둘이 함께 미아리 근처 내 여자 친구 집으로 몰려가 나는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김민기는 기타만 둥둥 쳐 댔다. 왼종일 음대생은 그림을 그리고 미대생은 기타를 쳐 댔다. 아주 우스꽝스런 자리바꿈이었다.

나는 그가 평생 노숙자로 살아갈 줄 알았는데 어쩌다 지금은 문화경영자가 되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타고난 예술성에 경영력까지 겸비한 매우 드문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의 탁월한 예술성은 그가 만든 '아침이슬'이라는 노래 하나만을 뜯어 봐도 알 수 있다. 감히 말하건대 그의 노랫말은 김소월 윤동주 정지용에 손색없고 작곡 솜씨 또한 김동진 윤이상에 버금갔다. '아침이슬'을 쓴 음률시인이 대학시절 졸업 학점이 모자라 한 학기 낙제했다는 일화를 윤병로 서울대 미대 교수한테 듣고 한참 웃었던 적 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뒤 생전 처음 미술 전시회를 열게 해 준 것도 김민기였다. 그는 일개 미대생에 불과했는데 탁월한 경영력으로 안국동 골목에 있던 '한국화랑'을 빌려 아마추어 화가 '조영남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팜플릿에는 그가 미술평론까지 썼다. 그 때의 필명이 김맹갈(¤)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간 뒤 우리의 친교는 편지로 이어졌다. 젊은 날 그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쫓기는 신세로 일관했다. '아침이슬'이 화근이었다. 그 노래가 이른바 운동권 주제가로 둔갑하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찍힌 몸이 되었던 거다. 그 때 그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도 짓고 야학도 하고 빵공장에 취직한 걸 편지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편지가 끊겼다. 나는 7년 뒤 귀국하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소식이 끊긴 친구를 위한 노래를 하나 지었다. 외국곡에 가사를 붙였는데 '김군에 관한 추억'이라는 노래다. 그 때 마침 김민기가 고생고생하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추모가를 만들었던 거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그는 멀쩡했다. 그 노래는 사장됐고 그로부터 20여년 뒤 내 가수 생활 '30주년 기념음악회' 무대에서 공개되었다. 관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20여 년 만에 그 노래를 불렀다. "여러분! 제 친구 김민기가 죽었다치고 노랠 들어주십시오." 그 날 밤에도 우리는 새벽 4시까지 술을 퍼마셨다. 그의 웃음 소리와 심성의 결도 여전했고 술 마시는 솜씨도 여전했다.조영남 가수

▼“내 추모곡까지 썼던 영남이 형…이번엔 또 뭘 썼어요?”▼

김민기(56) 학전 대표에 대한 조영남(62) 씨의 애정은 원고지 12장을 빼꼭히 채워나간 글자마다 묻어났다. '내 마음속의 별'로 주저 없이 김 대표를 꼽은 조 씨는 원고 청탁한지 이틀 만에 술술 손으로 써내려간 원고를 팩스로 보내왔다.

30여년을 함께 한 만큼 누구보다 '맹갈이'를 잘 아는 조씨였지만, 자기에 대해 쓴 걸 알면 화를 낼 거라던 그의 추측은 빗나갔다.

'내 마음 속의 별'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맹갈이'는 '버럭'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웃곤 느릿하게 물었다. "또 뭘 썼어요?"

전날 밤을 꼬박 새우고 일했다는 그의 목소리는 오전 11시에도 잔뜩 잠겨 있었다.

맹갈이라는 별명에 대해서는 "대학 때부터 '맹¤'로 불렸다"며 "'만들다'라는 뜻의 (사투리) '맹글다'에서 따왔던 것 같은데 지금도 친한 이들은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멀쩡히 살아서 들어야 했던 자신의 추모가'에 대해 그는 "영남이 형이 팝송에다 가사를 붙였던 노래"라고 기억했다. 당시 가사가 절절했느냐고 묻자 "절절은 무슨. 살아있는 사람 추모곡이라니, 웃기는 얘기였죠"고 말한다.

"영남이 형이 귀국했을 때 공항까지 마중 나갔어요. 내가 죽은 줄 알고 노래까지 만들어왔는데 공항에 내가 나타나 자기 기타까지 받아들었으니 아마 형 기분이 안 좋았을 걸요? 자기가 애써 만들어 온 노래를 못 부르게 돼서…."(웃음)

그는 예전만큼 자주 술을 마시지 않는다. 조 씨의 글에 나오는 전설 같은 '3박4일' 음주가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바로 정정했다. "3박4일이 아니라 무박3일이었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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