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옥자]독립운동가 후손이 분노하는 이유

  • 입력 2007년 3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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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의에 참석했다가 일어난 일이다. 회의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광복절 행사를 좀 더 새롭게 해 시들해지고 있는 국민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광복절 행사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하는 모임이었다. 회의 참석자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 한 분이 “독립운동의 장소도 보존하지 못하면서 무슨 다음 광복절 이벤트를 준비하겠다는 거냐”고 소리쳤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태화관이 있던 자리도 보존하지 못했다”며 화를 냈다.

처음엔 불쾌했다. 독립운동가의 3세쯤 되어 보이는데 부모 나이쯤 되는 2세들 앞에서 자신이 독립운동가연 큰소리치며 회의 절차를 무시하고 고함부터 치는 행동이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광복절 기념행사를 준비하려는데 3·1절과 관련되는 유적지를 들고 나오는 것도 그랬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면서 몇 가지 문제점이 떠올랐다. 우선 우리 모두의 무관심이 문제였다. 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죽음으로 맞선 독립운동가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까마득하게 잊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반성이 들었다. 태화관이 고층 빌딩으로 변하도록 무심히 지나다가 그 앞에 표석 하나 달랑 세워 놓고 할 일 다한 듯이 잊고 지냈다.

주요 유적지는 반드시 보존해야

기미독립운동은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東京) 한국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부터 시작해 3월 1일을 정점으로 5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 218개 군에서 200여만 명이 1500여 회의 시위에 참가했다. 따라서 관련 유적이 흩어져 있어 이루 다 보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요 유적지는 반드시 보존해야 옳다. 후생들을 위한 산 교육재로 독립운동의 현장만큼 좋은 것은 없다. 아무리 교과서에서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르쳐도 현장에서 설명하는 만큼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교육은 되지 않는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들로 하여금 이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참여시키는 방법도 있다. 손톱만 한 역사적 근거만 있어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경쟁적으로 테마공원을 만드는 마당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발굴하여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무슨 과제가 제기될 때마다 항상 예산 문제가 앞서는데 과거사 정리 사업에 드는 예산으로 되지 않을까 싶다. 역사라면 될 일을 ‘과거사’라는 특수 용어를 만들어 친일파 명단이나 만들고 광복 후의 민주화 문제 등에 치중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나라가 있고 나서 민주화운동도 있고 인권운동도 있는 것이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독립운동의 유적지 보존이 우선순위다.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국가적 보상이나 예우에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국가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들을 지속적으로 현창하고 그 후손들에 대한 처우도 개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싶다. 후손들이 제대로 대우받으면서 그렇게 화를 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노여워하지 않는 풍토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는 국민적 함의가 강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치열했던 의병 활동의 맥은 1895년 국모인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으로 재연되었다. 이러한 범국민적 저항 운동의 흐름이 일제의 압제에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기미독립운동으로 활화산처럼 타올라 들불처럼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다.

국민 모두 참여하는 행사 마련을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로 국경일로 제정된 3·1절의 의미는 해가 갈수록 퇴색하고 있다. 틀에 박힌 엄숙한 기념식만이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는 길은 아니다. 다시 3·1절을 맞아 그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대한민국의 활력을 충전하는 경축일로 거듭나게 하면 어떨까 싶다. 이제는 일제에 대한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하여 광복절과 3·1절을 국민 축제일로 탈바꿈시켜도 좋지 않을까.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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