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65년 리 장군, 美남부군 총사령관 임명

  • 입력 2007년 1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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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었나, 반역자였나.’

19일은 미국 남북전쟁(1861∼1865) 당시 남부군 총사령관을 지낸 로버트 리 장군의 출생 200주년이었다.

미국 곳곳에서 각종 기념행사와 학술회의가 열렸고 그를 둘러싼 오랜 논쟁도 여전했다.

한편에선 “주정부의 자치권을 위해 싸운 영웅이었다”고 추앙하고 다른 한편에선 “노예제도를 위해 연방정부에 맞선 반역자였다”며 단죄한다. “어쩔 수 없이 대의 없는 전쟁에 휘말린 ‘비운의 주역’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양한 평가만큼이나 리 장군은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육사를 차석 졸업하고 멕시코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뛰어난 군인이었다. 남북전쟁 직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으로부터 연방군의 고위 사령관 직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한때 수십 명의 노예를 소유했던 그였지만 노예제도에는 부정적이었다. “노예제도는 도덕적, 정치적 악(evil)”이라고 쓴 기록도 발견됐다. 그러나 출생지인 버지니아 주가 연방에서 탈퇴하자 그는 남부군을 택했다.

전쟁 초반 수세적으로 참호전에만 의존한다는 이유로 ‘할멈 리(Granny Lee)’, 또는 ‘삽질의 왕(King of Spades)’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탁월한 전술과 기동력으로 잇단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객관적인 물자와 전력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게티즈버그 전투 패배 이후 남부군은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탈영병이 속출했고 갈수록 전황은 불리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리 장군은 남부연방 의회의 결의에 따라 1865년 1월 31일 총사령관으로 승진 임명됐다. 군 출신인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방 대통령이 직접 맡았던 군 전반의 지휘권을 리 장군에게 이양한 것이다.

그는 취임 후 흑인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부대를 편성해 훈련시키며 전열 정비에 나섰다. 하지만 남부연방 수도 리치먼드가 함락되자 그는 “더 피를 흘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북부군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깨끗이 항복했다.

그 뒤 리 장군은 1870년 사망할 때까지 명예로운 말년을 지냈다.

누구보다 앞장서 연방 재건을 지지했고 워싱턴 칼리지(오늘날의 워싱턴 앤드 리 대학) 총장으로서 “모든 학생은 명예로운 신사”라는 모토를 내걸었다.

적장에 대한 신의도 잊지 않았다. 한 교수가 대통령선거에 나선 그랜트 장군을 헐뜯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또다시 그랜트 장군을 깎아내리는 얘기를 꺼낸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이 대학을 떠나야 할 겁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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