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8년 美푸에블로호 北나포

  • 입력 2007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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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한다.”

1968년 1월 23일 오후 1시 45분 동경 127도 54분, 북위 39도 25분 북한 원산항 앞 공해(公海)상.

미군의 최신예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의 함장인 로이드 부커 중령은 갑자기 나타난 북한 초계정의 위협에 깜짝 놀랐다.

이어 미그기 두 대가 공중에서 위협비행을 하더니 북한 초계정과 구잠함(驅潛艦)이 잇따라 몰려들었다. ‘뭔가 잘못됐다.’ 화력에서 밀리는 푸에블로호는 달아나려 했으나 구잠함의 잇단 함포 사격을 받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포격으로 1명이 사망하기까지 했다.

푸에블로호는 이렇게 순식간에 나포(拿捕)됐다.

미국은 비상이 걸렸다. 세계는 경악했다. 미 해군 106년 역사상 해군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를 동해로 급파하는 등 비상조치를 취했고 한국도 전쟁 태세에 들어갔다. 곧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한국은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청와대 습격사건’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위급한 국가 안보 상황에 처한 것이다.

피랍 다음 날인 24일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일부에선 핵공격 주장도 나왔지만 당시 베트남전으로 고전하고 있었던 미국으로선 또 하나의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우방인 소련에 “압력을 가해 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소련 주재 북한대사가 소련 외교부 장관의 호출에도 응하지 않을 정도로 북한은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인질을 붙잡은 북한의 요구는 단 하나. “영해 침입을 시인하고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11개월을 질질 끌다가 미국이 사과한다는 조건으로 12월 23일 82명의 생존 승무원과 시체 1구가 판문점을 통해 돌아와 해결됐다. 하지만 선체와 장비는 북한에 몰수됐다. 미국은 보상금도 지불한 것으로 추정됐으나 자세한 합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북한은 사건이 해결된 뒤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에 묶어 두고 수십 년간 반미 사상 교육에 이용했고 1990년대부터는 외국인을 상대로 한 관광상품으로 돈벌이까지 했다.

당시 인질 송환을 위해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요지의 승무원 석방문서에 서명한 미국은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으로 두고두고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안아야 했다.

김상수 기자 s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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