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1세기 新이념 지형]<4·끝>한국적 제3의 길 ‘공화주의’

  • 입력 2007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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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민족, 노동담론이 해체된 포스트 87년 체제에 새롭게 부각되는 사상이 공화주의(republicanism)다. 새로운 담론을 찾아 나선 보수·진보의 논객들이 공화주의의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공화주의는 아직도 낯선 개념이다. 미국 공화당의 지도이념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당연히 공화주의가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공화주의는 17, 18세기 확립된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근대정치사상의 발원지였다. 동시에 고대 로마공화정과 14∼16세기 피렌체와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라는 정치적 실체로도 존재했다.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혁명을 추동한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가 공화주의를 근대에 이식시키겠다는 열정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상이 개별적 발전경로를 걸으면서 그 사상적 유산만 물려준 채 사실상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자유와 법치는 자유주의로, 평등과 참여는 민주주의로, 평등과 시민적 덕성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로 선택적으로 계승됐다.

○ 왜 지금 공화주의인가

사실 서구에서는 정치적 무관심의 확산, 금권주의와 대중영합주의의 팽배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화주의는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고대 그리스로마 정치의 부활을 강조한 한나 아렌트가 그 선구적 존재였다면 1990년대 이후 미국 건국정신에서 공화주의를 재발굴한 J G A 포코크,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관계를 조명한 리처드 대거와 필립 페티트, 이탈리아 도시공화국의 공화주의 부활을 제창한 모리치오 비롤리 등은 그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엘리트 중심의 자의적 권력이 야기할 소수의 오만을 경계하는 것만큼이나, 민중의 무제한적 권력이 야기할 우매함의 확산 역시 경계했던 공화주의를 현대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재조명했다.

공화주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처럼, 세습귀족은 아니지만 국가를 이끌 시민적 덕성이 남보다 뛰어난 엘리트적 존재로서 ‘천부적 귀족(natural aristocrat)’을 긍정한다. 또한 국민에 의한 통치(by the people)의 자의성을 경계해 직접민주주의보다 대의제를 선호한다. 이러한 점은 민주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심화되는 포퓰리즘의 해독제로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정치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적극적 참여를 고귀한 가치로 여기는 공화주의에서, 모든 민주국가에서 일반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치유책이 모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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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적 공화주의에 대한 암중모색

한국사회에서 공화주의 연구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열풍이 지나가고 난 2000년대 이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는 한국적 자유민주주의의 미래로 제시한 ‘공동체 자유주의’의 역사적 모형의 하나로 공화주의를 주목했다. 박 교수는 “개인주의적 전통에 있는 자유주의는 정치적 공동체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기 때문에 공화주의의 이타주의적 요소를 적극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초판(2002년)에서 위기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공화주의를 재조명했다. 비록 2005년 개정판에선 한국적 맥락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가 대의제를 옹호하는 헌정주의로 단순 귀결된다는 태도 변화를 보였지만 공화주의의 가치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도 ‘한국,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2005년)에서 ‘포스트 386세대의 정치이념’으로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익에 대한 관심과 결합할 경우 공화주의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자세히 소개했다.

○ 심화하는 공화주의 연구

이런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구체적 내용을 고민하는 진보그룹과 한국적 자유주의로 공동체 자유주의를 모색하는 뉴라이트 그룹 양쪽에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모리치오 비롤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공화주의’를 함께 번역한 김경희 경희대 NGO 대학원 연구교수와 김동규 박사는 공화주의의 한국정치 접목 가능성을 모색 중인 연구팀의 일원이다.

김 교수는 “독선과 배제의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는 민족주의, 인간관계의 예속화를 양산하는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부를 통해 구체화된 포퓰리즘에 대한 거부와 그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공화주의를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김 박사는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되 인민의 문제를 인민이 해결할 수 있다는 ‘국민에 의한 통치(by the people)’ 사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대의제적 요소가 엘리트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국민을 위한 통치(for the people)’ 사상에 충실한 새로운 한국형 공화주의를 창출해 내려 한다”고 말했다.

뉴라이트운동의 모태였던 자유주의연대 또한 자신들의 이념으로 제시한 ‘공동체적 자유주의’의 구체적 대안으로서 공화주의에 주목하고 있다.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는 “자유주의에서 결여된 공동체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줄 수 있고, 현대 민주주의의 병폐인 정치적 무관심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포퓰리즘의 위험을 차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화주의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 자유주의에 대한 보완이념으로서 공화주의의 가치에 주목하는 김성호(정치외교학) 연세대 교수는 “공화주의는 정치사상사에서 꿀 수 있는 가장 큰 꿈이지만 17세기 이후 수백 년간 죽은 이념이라는 점에서 이를 원형 그대로 부활시키기보다는 한국적 상황에 맞게 필요한 부분을 취사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김 교수는 “자유주의의 자유와 법치가 대신할 수 없고, 민주주의의 평등과 참여가 대신할 수 없는 것, 바로 시민적 미덕의 담론”이라고 강조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공화주의(republicanism)란▼

공화주의는 라틴어로 ‘공적인 일’ 또는 ‘공적인 공간’을 뜻하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에서 비롯했다. 이는 권력자의 사적 지배 공간으로서 ‘레스 프리비타(res privita)’와 대비되는 용어다. 이를 번역한 한자어 ‘공화(共和)’는 ‘여러 사람이 화합해 공동의 일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 어원처럼 공화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가치공동체를 추구하는 사상을 말한다.

플라톤은 지상의 정치체제를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으로 분류한 뒤 이들 정치체제는 각각 참주정, 과두정, 중우(衆愚)정으로 타락하기 쉽다고 경고했다. 플라톤은 그 대안으로서 철인군주 체제를 제시했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3개 정치 체제를 섞는 혼합정으로서의 공화정을 선택했다. 실제 로마공화정은 군주에 준하는 1년 임기의 집정관,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회와 호민관을 통해 이 같은 혼합정의 이념을 실현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의 핵심가치는 무엇인가. 자유, 법치, 평등, 참여, 시민적 덕성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는 ‘국가의 간섭이 없는 개인주의적 자유’가 아니라 ‘주종관계로 예속되지 않는 정치적 자유’다. 정치적 예속에 반대하기 위해선 그 구성원의 평등이 필수적인데 그것은 사회경제적 평등이 아닌 ‘법 앞의 평등’을 의미한다.

공화주의는 구성원들이 강제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것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공화국의 시민을 선택하는 순간, 이미 참여는 의무이자 권리가 된다. 그리고 공화주의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공동체에 대한 대승적 사랑(카리타스)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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