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어둠속의 ‘한국 고문사’…‘야만시대의 기록’

  • 입력 2006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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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시대의 기록/박원순 지음/각 권 500쪽 안팎·2만5000∼3만5000원·역사비평사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여전히 그곳은 절대 고립의 상태였고, 세상의 절망이 닻을 내린 곳이었다. 허울 좋은 캐치프레이즈가 외쳐질 때도 고문장에서 끝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에도 우리는 종로 네거리를 걷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전철을 타고, 그리고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그리고 이제는 싱크탱크 희망연구소의 수장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박원순 변호사가 ‘고문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방대한 3부작 보고서를 내놓았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독재의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 깊은 정신적 외상을 남긴 고문의 역사는 조국 서울대 교수의 말처럼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역사’다.

어둡고 깊숙한 곳에서 비밀리에 행해지기 때문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희생자에게 그것은 육체와 정신의 마지막 방어선까지 무너뜨린 처절한 치욕의 기억이다. 이 때문에 그것을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격심한 고통이다.

저자는 ‘양심의 촛불’을 들고 그 어둡고 컴컴한 지하 동굴 속 순례를 제의한다. 누군가의 영혼에 그 끔찍한 낙인이 찍히는 동안 그것을 외면하고 침묵하고 심지어 부정했던 것에 대한 도덕적 부채의식을 벌써 그렇게 깨끗이 잊었느냐며.

책을 펼쳐 들면 고문 관련 사료들의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10여 년에 걸쳐 수집했다는 국내외 고문 관련 각종 언론 보도 내용은 물론 단행본, 논문, 자료집, 법원 판결문, 국제사면위원회(AI) 보고서에 최근 인터넷 자료까지. 거기에는 국가에서 정치적 의도로 조작해 낸 시국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운동가와 일반인에 의해 자행된 고문의 사례까지 촘촘히 담겨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고문의 범죄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고문은 현대의 전염병’이라는 병리학적 분석으로 발전한다. 이는, 미워하는 사람의 캐릭터에 대한 갖가지 고문을 ‘재미’로 가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온갖 변태적 가학행위가 확대 재생산되는 우리 일상에서 확인된다.

“고문은 우리 주위에 늘 서성이고 있다. 그만큼 일상적 현상이 되고 말았다. 과거처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고문은 아닐망정 마치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처럼 우리를 괴롭힌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의 입구에 ‘여기 들어오는 자,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고문은 바로 그런 지옥의 체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의 안내를 따라 고문의 지하동굴 순례에 나서다 보면 단 하나의 희망만큼은 버릴 수 없게 된다. 바로 고문 없는 세상에 대한 희망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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