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무슬림으로 산다는 것은

  • 입력 2006년 9월 20일 16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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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수씨(41세)가 경찰서 외사계에서 조사를 받은 것은 지난해 3월 말. 종교자문관 겸 아랍어 통역(군무원 5급)으로 자이툰 부대에서 1년간 근무하고 귀국한 직후였다. "당신이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랐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영화에나 나옴직한 스토리가 자신의 얘기일 줄이야….첩보의 내용은 "한국사람인데 이라크에서 귀국했다. '살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출두에 앞서 경찰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별 것 아니니 한 번 와서 털고가는게 좋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경찰의 조사는 7시간이나 계속됐다. 자이툰 부대 근무시 행적과 파키스탄 유학당시의 생활 등에 대한 질문이 반복됐다. 결국 '첩보'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에게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잔상으로 남아있다. "자이툰부대에서 병사들과 같이 방탄복 입고 순찰을 다녔는데…한마디로 코미디죠."

2006년 한국에서 무슬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고등학교 1학년때 친구따라 서울 한남동 이슬람중앙성원에 왔다 무슬림이 된 정씨는 25년째 독실한 신자다. 정씨는 한국 무슬림들에게는 꽤 알려져있는 인물이다. 중앙성원 근처에서 99년부터 터키음식점 '살람'을 운영해 매스컴도 몇차례 탔다.

해뜨기 1시간 전, 정오, 오후, 일몰 후, 밤 등 하루 다섯차례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지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린다. "한국에서는 어느쪽으로 절을 하느냐"고 했더니 "대략 인천 방향"이라고 말한다. "일상생활에서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술 안먹고, 상가집에서 절 안하고…약간의 오해도 있지만 뭐 그정도지요."

그는 한 눈에 외향적이고 활달한 사람이었다. 거리낌없이 할 말을 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그의 삶은 확연히 변했다. "그 때부터 말하는 것이 겁이 나더라고요. 오해받지 않을까 해서요." 89년부터 그가 7년간 유학했던 파키스탄 국제 이슬람대학(IIUI) 졸업장도 파키스탄에 갔다 오해받지 않을까 걱정돼 가져오지 못했다. 같이 공부했던 동창생들과의 국제전화도 조심스럽다. 중동정세와 같은 민감한 사안은 아예 꺼내지도 않는다. 무역업도 하기 때문에 돈거래도 해야하는데 '테러 자금'으로 오해받을까 그것도 포기했다.

정보기관 경찰 군에 자문도 많이 해주지만 거꾸로 감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슬림끼리 '넌 어디 끄나풀이냐'고 묻는 것은 흔한 농담이다.

한국인 무슬림은 등록인원으로 4만명. 무슬림이 아니면 중동에서의 사업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신자로 등록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정씨는 무슬림에 대한 일반의 오해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말은 이슬람에 없습니다. 오히려 '종교에는 강제가 없나니'라는 말이 꾸란에 있지요." 그는 이슬람이 '폭력적'이란 오해가 이슬람에 대한 지식의 부족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도 종교전쟁이 아닙니다. 생존권 전쟁이지요. 아랍에서는 '아랍사람이 비아랍 사람보도 우월할 수 없고, 비아랍 사람이 아랍사람보다 우월할 수 없다. 다만 지식의 차이는 있다'고 가르칩니다." 최근 문제가 된 교황 베네딕트 6세의 이슬람 발언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우리 내부에서는 별 반응이 없다"는 것이 정씨의 설명이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정씨의 휴대전화가 연신 울렸다. "정보기관입니다." 정씨가 씽긋 웃었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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