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는 안방마님 아니더이다…간택때부터 권력투쟁

  • 입력 2006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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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정순왕후’의 한 장면. 동아일보 자료사진
연극 ‘정순왕후’의 한 장면. 동아일보 자료사진
《조선시대 왕은 27명이었던 반면 왕비는 37명으로 10명이나 더 많았다. 이는 훗날 왕비로 추증된 경우는 빼고, 폐비가 되어 선원계보(왕실족보)에서 빠진 8명은 포함된 수다. 조선시대 임금은 수많은 독살설에 시달릴 만큼 평균수명이 짧았다. 반면 왕비는 대개 왕이 죽은 후에도 대비와 대왕대비로 남아 오랜 수명을 누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왕비의 수가 더 많았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재독학자 변원림 씨가 최근 발간한 ‘조선의 왕후’(일지사)는 이 수치가 조선의 왕비들이 왕 못지않게 살벌한 정치투쟁 속에 살았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실제 생몰연도가 확인된 왕비 32명의 평균수명은 47.5세로 조선 왕의 평균수명 47.1세와 비슷하다.

조선의 왕비 중에서 어린 나이에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남편인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왕비가 되고, 왕이 죽은 뒤 자신의 친아들이 즉위함으로써 대비가 돼 죽은 왕비는 딱 한 명, 현종 비 명성왕후 김씨뿐이다. 이를 포함해 왕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왕비에 오른 경우는 6명뿐이다.

반면 결혼한 뒤 남편이 왕이 되는 바람에 왕비가 된 11명,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가 된 7명 등 18명은 ‘우회상장’을 통해 왕비가 됐다.

왕비가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정치적 동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은 궁전에 첫 발을 딛는 왕세자빈 간택 때부터 시작됐다. 조선은 왕세자빈을 뽑을 때 전국에서 10∼13세 처녀의 금혼령을 내린 뒤 보통 3차례에 걸친 간택을 통해 뽑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간택은 권신가문의 딸을 점지해 놓은 상태에서 들러리를 뽑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간택 과정에서 후보로 지명됐다 왕비로 뽑히지 못할 경우 평생 시집을 못 가는 데다 일부는 명나라에 바치는 처녀조공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한 조혼의 풍습이 계속됐다.

이런 이중성은 왕실이 기대하는 이상적 왕후상과 현실적 왕비상의 간극에서도 드러난다. 왕세자빈에게 보내는 조선 임금의 편지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이상적 왕비상은 왕에게 순종적이고 온화하고 공손한 여인이었다. 또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조차 여성의 정치참여를 막기 위해 왕세자빈에게 글공부를 시키는 것을 포기할 만큼 똑똑한 여성을 기피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조선의 왕비는 자의든 타의든 적극적 현실참여를 요청받았다.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펼친 왕후가 정희(세조 비), 문정(중종 비), 인순(명종 비), 정순(영조 비), 순원(순조 비), 신정(익종 비) 등 6명에 이르렀다.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후세에 또렷이 기억되는 왕비와 왕세자빈도 많다. 인목왕후와 혜경궁 홍씨, 명성황후(고종 비)처럼 치열한 권력투쟁의 한 축을 이룬 이들도 있었고, 제헌왕후 윤씨(성종의 비)와 희빈 장씨(숙종 비)처럼 그 투쟁에 패배해 목숨을 잃는 이들도 있었다.

변 씨는 “실제 왕비들의 정치적 역할이 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정치가로서의 소양교육은 실시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왕비들은 만백성의 이익보다는 친정의 이익 등 사적이익만 추구하다가 척족세력의 득세를 낳는다. 또 노회한 훈구대신에 농락당해 완고한 정책을 시행하다 왕실권력의 약화를 불러온 경우도 많았다.

남편(사도세자)을 죽이고 자신의 아들(정조)까지 죽이려 했던 친정을 옹호했던 혜경궁 홍씨의 사례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세 차례에 걸친 천주교 박해가 정순과 순원 왕후의 수렴청정기에 일어났던 것은 후자를 뒷받침한다.

재미있는 점은 왕비들의 정치적 라이벌이 시어머니인 대비였던 경우가 많았다는 분석이다.

특히 다른 궁에 거처했던 대비가 왕과 한 궁에 살기 시작한 인조 이후 후궁과 왕비의 권력투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왕비를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대비들이 후궁을 적극 후원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설명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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