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3년 새 가정의례준칙 시행

  • 입력 2006년 6월 1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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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 1일 서울 중심가의 주요 예식장에서 단 한 건의 결혼식도 열리지 않았다. 평일이긴 했지만 하루 전인 5월 31일까지 식장이 북적대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6월의 첫 일요일인 3일에도 종로의 한 예식장은 겨우 3건의 결혼식 예약을 받았다. 예년 같으면 예식장마다 70∼80건씩 밀려들었을 6월치 예약도 10여 건에 불과했다.

새로운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및 ‘가정의례준칙’이 1일 발효됐기 때문이다.

관혼상제를 법으로 규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9년 법을 처음 만들 때는 권고만 하는 수준이었으나 성과가 없자 여섯 가지 금지 사항과 처벌 규정으로 강화했다.

‘혼례 수연의 청첩장이나 부고장을 돌리면 안 된다. 화환을 진열하면 안 된다. 답례품을 주면 안 된다.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입으면 안 된다. 만장(輓章)을 사용하면 안 된다. 술이나 음식물을 대접하면 안 된다. 이를 어기면 즉결재판에 회부돼 5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혼례를 치르려면 편지를 수백 통씩 쓰든지 일일이 전화하거나 직접 만나 알려야 했다. 전화가 귀하디귀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불편함이란…. 신랑 신부에게 오색 테이프 감아 주고 꽃가루 뿌려 주기는 물론 온 동네 떠들썩하게 분위기 띄우던 함진아비도 모습을 감춰야 했다. 하객들은 축의금이 금지된 줄 알고 빈손으로 오기도 했다. 혼주들은 예물교환을 하지 않도록 권장한 것을 금지로 착각해 혼선을 빚었다.

제사는 부모 조부모까지만 모시도록 했으며 장례 때는 노제 삼우제를 없애도록 했다.

새 법과 준칙이 시행된 한 해에만 법 위반으로 적발된 것이 974건이었다. 그중 굴건제복 착용이 143건이었으니 상주로선 설상가상이었다. 부유층의 호화 혼수는 드러나는 대로 국세청에 통보됐다.

그해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01달러. 벌금 50만 원이면 쌀은 51가마, 금은 136돈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허례허식에서 비롯되는 서민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조치였지만 관습을 법으로 규제하는 데 대해서는 불만도 많았다. 이 법과 준칙은 결국 1997년 ‘건전 가정의례의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과 ‘건전 가정의례준칙’으로 대체됐다.

‘6금(禁)’의 법은 굴건제복과 만장엔 ‘완승’을 거뒀으나 그 밖의 것들엔 ‘역전패’한 듯하다. 요즘의 결혼식장, 장례식장은 ‘꽃 대궐’을 이루지만 아무도 허례허식이라고 눈총 주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윤택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좌번호가 적힌 청첩장, 축의금 조위금으로 가장한 뇌물은 여전히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여규병 기자 3spring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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