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반환…日帝강탈 문화재 반환 귀중한 선례

  • 입력 2006년 5월 31일 03시 04분


코멘트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오대산 사고.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총독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이번에 서울대로 반환된다. 사진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오대산 사고. 오대산 사고본은 1913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총독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이번에 서울대로 반환된다. 사진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47책은 그 내용이 국내에 보관된 정족산본 실록 1187책과 태백산본 848책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대산본은 임진왜란 때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교정본이라는 점에서 그 희귀성을 평가할 수 있다. 93년 만의 오대산본 귀환의 진정한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대규모로 반출된 문화재 반환의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실질 성과 거둔 반환 협상=일본 도쿄(東京)대 귀중 서고에 간토(關東)대지진 때 살아남은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보관돼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우리 학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불교계, 시민단체, 정치권에서 반환 운동에 나섰다. 특히 불교계가 중심이 돼 올해 3월 출범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는 실록 환수를 위해 도쿄대와 수차례의 협상을 벌였다.

도쿄대는 한국 측의 절실한 태도를 확인하고도 최근까지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한국 측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줄 경우 일본 내 우익 세력이 강력 반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쿄대는 반환이 아니라 개교 60주년을 맞은 서울대에 국립대 간 학술 교류협력 차원에서 고문서를 기증하는 모양새를 택했다. 도쿄대는 1932년에 이미 오대산본 27책을 서울대로 보낸 적이 있었다.

독도 문제,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의 정치적 관계가 경색된 상태에서 이 같은 합의가 이뤄진 것은 양국의 민간부문이 최근 수년간 꾸준히 추진해 온 다양한 ‘비정치적’ 교류 협력의 결실로 평가된다.

이태진(역사학) 서울대 교수는 “도쿄대가 2004년 국립대에서 국립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 소장품이 일본 국가 소유가 아니라 법인 소유가 됐다는 점이 반환 협상의 부담을 덜어 줬다”고 말했다. 이번 반환 결정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고 있는 프랑스의 규장각 도서 반환 협상에도 무게를 실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불교계 반응=그동안 실록 반환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온 불교계와 환수위 측은 조선왕조 시절 강원 오대산 월정사가 사고 관리를 맡아 왔다는 점을 근거로 “반환되는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이 아니라 월정사가 소장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불교계 환수위 실무자들이 이날 3차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상태에서 일본 측이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며 실망감을 나타냈다.

환수위 공동의장인 오대산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일본 측이 우리 것을 돌려주는 것이면서도) 아량을 베푸는 듯한 태도를 보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오대산 사고본은▼

임진왜란후 전주본을 원본삼아 교정

1913년 반출… 47책만 도쿄대서 보관

실록은 임금이 서거한 뒤 그 임금의 통치기 조정에서 일어나거나 보고된 일들을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연대기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실록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조선 초기에는 2벌씩 목판으로 인쇄해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에 분산 소장되다 세종 21년(1439년) 2벌씩을 더 만들어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신설해서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만 남고 모두 불탔다. 선조는 이를 원본으로 모두 5벌의 실록을 만들어 1벌은 한양의 춘추관에 두고 강화도 마니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해 각각 1벌씩 나눠 보관했다. 이때 전주본이 마니산으로 갔고 오대산에는 전주본의 오탈자의 교정을 본 교정본이 갔다.

춘추관 소장 실록은 1624년 이괄의 난 때 모두 불탔고 묘향산 사고의 실록은 후금(後金)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1633년 전북 무주의 적상산으로 옮겼다. 마니산사고의 실록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파손됐는데 현종 때 이를 보수하고 1678년(숙종 4년) 강화도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 이후 철종실록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벌씩 보관됐다.

1910년에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면서 정족산 태백산사고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구황궁(舊皇宮) 장서각에 이관됐다. 오대산사고의 실록은 일본의 도쿄제국대(도쿄대 전신)로 1913년 반출됐다가 1923년의 일본 간토대지진 당시 대부분 타서 없어지고 74책만 남았다. 이 중 27책은 1932년 경성제대(서울대 전신)로 다시 돌아왔으나 성종실록 9책, 중종실록 30책, 선조실록 8책 등 47책이 도쿄대에 계속 보관돼 왔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