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 입력 2006년 4월 1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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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박이문 지음/213쪽·9800원·미다스북스

‘양심에 따라 고려왕실에 충절을 지키다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한 정몽주와 몰살당한 그의 가족들, 한편 그를 죽인 뒤 한 왕권을 약탈하고 500년 동안 자손을 많이도 번식한 이방원.’

어느 쪽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6·25전쟁 때에도 한 동네에서 나름대로 똑똑하고 꼿꼿했던 탓에 공산주의자 혹은 국군에게 학살당한 사람이 있는 반면 머리가 부족했거나 실리에 약삭빠른 덕분에 살아남아 면장 군수 국회의원이 되고 자손을 번식하고 출세시킨 이들도 있었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시대, 강하게 살아남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당대의 석학인 원로 철학자가 털어놓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다 보면 차라리 당황스럽다.

저자는 험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유전자의 강함에 자랑스러워하는 대신 ‘생명의 조상인 박테리아의 유전자가 얼마나 지독한 경쟁력을 가졌기에, 나의 조상이 얼마나 독종이고 꾀가 많았기에, 신경이 얼마나 두터웠기에 그 수많은 치욕을 견뎌내고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한다.

생존경쟁의 승리자로서 크나큰 긍지를 느껴야 할 것이지만 살아남은 자신에 대해 느끼는 어쩐지 거북하고 계면쩍은 감정…. 철학은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윤리적 존재’다. 중요한 것은 ‘바퀴벌레처럼 번식하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영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존재할 것인가’이다. 살아있는 한 어느 누구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지나칠 수 없다.

이 책은 현재 미국 시몬스대 명예교수이며 연세대 특별초빙교수인 저자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서 어떤 이들과 살아야 하는가,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 누구나 부닥치는 문제를 쉽게 풀어 쓴 철학 에세이다. 저자는 ‘스스로에게 실천적 삶에서도 절실한 주제’ 18개를 골라 독자에게 함께 생각해 보자고 권유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저자가 명쾌하게 답을 말해 주리라 기대하는 독자는 책을 읽으며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대답을 제시하는 대신 질문을 던지는 책이라서다.

평생 철학을 공부해온 저자도 종교적 경전과 서양철학의 고전들조차 우리를 실존적 방황에서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면서 ‘방황은 인간의 운명’이라고 단언한다. 경전과 고전이 제시하는 그 위대한 대답들이 옳고 그른지를 무슨 근거로 판단할 것이며 인간의 삶은 아주 구체적인 작은 선택들로 이루어지는데 거창한 대답들이 대관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온갖 종류의 자기계발, 명상 서적들이 권유하는 ‘마음 비우기’가 잘 안 돼 스스로를 탓해본 독자라면 저자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자신에 대한 애착에 있다는 부처의 말씀은 옳지만 애착을 끊어버리라는 가르침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때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저자는 “무엇인가에 대한 애착이 없는 생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면서 아들의 유골을 화장터에서 들고 온 직후에도 맛있는 음식을 찾고 내일을 걱정하는 우리의 모습을 담담하게 술회한다.

쉬운 말로 쓰였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주제별로 골라 읽기보다 처음부터 정독해야 한다. 질문과 사유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인간이 꼭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사색으로, 실존적 선택과 사회적 규범에 대한 탐색으로, 도덕과 윤리에 대한 명상으로 뻗어간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 말마따나 ‘철학은 쉬운 것을 어렵게 말하는 담론이 아니라 가능하면 모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 모든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개인의 실존과 함께 살기 위한 사회의 조건을 넘나들며 ‘왜’냐고 묻는 저자의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도리 없이 ‘나는 잘 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질문 안에 답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독자를 보며 원로 철학자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당신도 철학적 사유를 하기 시작했군요!’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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