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결혼했던 比여성 눈에 비친 한국의 법

  • 입력 2006년 3월 2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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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씨는 인터뷰 도중 간간이 눈물을 보이며 “지난 일은 모두 잊었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아직도 많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G 씨는 인터뷰 도중 간간이 눈물을 보이며 “지난 일은 모두 잊었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아직도 많다”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필리핀인으로 한국 남자와 국제결혼을 해 한국으로 이주한 여성 G(34) 씨. 그는 한때 불법체류자였다. G 씨는 법원에서 남편의 폭행 등을 이유로 이혼 판결을 받은 뒤에야 겨우 한국 사람이 될 수 있었다. G 씨처럼 새로운 삶을 꿈꾸며 한국에 정착하려는 외국인 여성들에게 한국과 한국의 법은 낯설고 두렵다. 그는 ‘싸워 가며(struggling)’ 한국 국적을 얻었다. G 씨를 외면했던 한국의 법과 그를 도운 한국의 법에 대해 들어 봤다.》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빌고 또 빌었습니다. 무릎까지 꿇고 빌었지만 남편 없이는 체류기간 연장도 국적 취득 신청도 할 수 없었어요. 법이 그렇다는 거예요.”

G 씨는 한 종교단체의 소개로 2000년 10월 한국에서 김모 씨와 혼인신고를 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이주 여성’이라는 불안한 신분에 ‘가정 폭력’이라는 또 하나의 질곡이 겹쳤다. 다정해 보이던 남편은 결혼과 함께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G 씨는 아들을 임신했을 때부터 맞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G 씨는 아들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 참고 견뎠다. 남편이나 시댁에서 자신을 완전히 외면하면 ‘불법체류자’가 돼 갑자기 한국에서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출입국관리법은 한국인 배우자와 결혼한 외국인이 체류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남편이나 시댁의 신원보증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적 취득 신청도 남편과 동행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했다.

G 씨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결혼한 이주 여성의 국내에서의 신분은 남편과 시댁에 달려 있다.

“2004년 6월 체류기간이 끝났지만 남편이 도와주지 않아 연장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 집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1년간 불법체류자로 살았습니다. 벌금 100만 원을 내기도 했습니다.”

G 씨는 점점 더 심해지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서울 성북구의 가톨릭센터를 찾았다가 처음으로 ‘법의 도움’을 만났다. 이곳에 법률 지원을 나온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의 소라미(蘇羅美) 변호사를 만나게 됐다.

소 변호사는 남편에게 책임 있는 사유로 법원에서 이혼 판결을 받으면 남편이나 시댁이 아닌 제3자의 도움으로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줬다. G 씨는 남편에게 폭행당했을 때 준비했던 병원 진단서 등을 챙겨 소송을 냈다. 소송은 소 변호사가 무료로 맡아 주었다.

G 씨는 지난해 8월 법원에서 아들의 양육권과 함께 이혼 판결을 얻어 낸 뒤 가톨릭센터 신부의 신원보증으로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다. 결혼해서도 가질 수 없었던 한국 국적을 이혼한 뒤에야 얻게 된 것.

소 변호사는 “법무부 지침이 많이 바뀌어 ‘비정상적인’ 결혼 생활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 남편이나 시댁 식구가 아닌 제3자가 신원보증을 하기가 쉬워졌다”고 말했다.

G 씨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나은 경우다. 한국 국적도 얻지 못한 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외국인 이주 여성은 수없이 많다. 이들은 모두 법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고 있다.

소 변호사는 “이주 여성들은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맞고 살면서도 한국에서 쫓겨날 것이 두려워 ‘비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입증할 준비를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이주여성 14%가 맞고 살아… 따뜻한 법의 보호 아쉬워▼

지난해 7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국제결혼 이주여성 실태조사보고’에 따르면 여성 결혼 이민자의 10∼14%가 남편에 의한 신체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별거 중이거나 이혼한 이주 여성의 절반 이상은 남편의 폭력 때문에 헤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배재대 이혜경(李惠景·사회학) 교수는 “결혼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나라 사이 경제력의 차이로 부부관계가 계급화되고 폭력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이주 여성들은 합법적인 국내 체류 여부가 한국인 배우자에게 달려 있어 가정 폭력과 학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1997년 국적법을 개정해 외국인에게 ‘혼인’만으로 한국 국적을 주던 조항을 폐지했다. 대신 국내에서 2년 이상 거주한 뒤 한국인 배우자의 신원보증과 함께 법무부 장관의 귀화 허가를 받아야만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 이주 여성이 배우자의 폭력이나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다 불가피하게 결혼한 지 2년 이내 이혼할 경우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채 강제로 출국당해 아이들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4년 한국인 배우자 때문에 결혼 생활이 깨졌다는 사실을 증명할 경우 2년 이상 거주하지 않은 외국인도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요건을 완화했다.

문제는 언어뿐 아니라 한국 법률 지식도 거의 모르는 이주 여성들이 이 같은 제도를 활용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최진영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담실장은 “6만7000여 명에 이르는 이주 여성들의 국제결혼은 결혼 성립 단계에서부터 불평등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며 “가정 폭력 등으로 피해를 보는 이주 여성의 인권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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