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거장의 유려한 손놀림 차이콥스키 되살리다

  • 입력 2006년 3월 2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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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모스크바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우뚝 서 있는 그들의 전용 홀을 ‘차이콥스키홀’이라고 부를까. 19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 공연을 가진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모든 프로그램을 차이콥스키 일색으로 꾸며 차이콥스키에 관한 한 세계 최고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최근 대부분의 오케스트라는 저현악기가 무대 왼쪽 뒤로 가는 악기 배치를 하는 추세다. 이는 구소련 체제에서 모스크바필의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구 레닌그라드필)의 전설적인 지휘자 므라빈스키의 유명한 ‘레닌그라드 편성’의 변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1988년 첫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첼로와 바이올린이 양쪽으로 갈리는 편성을 채택한 모스크바필의 사운드는 중후하면서도 물결이 굽이치듯 유연했다. 과거 전성기, 거장 콘드라신이 포디엄을 이끌던 시대의 일사불란한 음악에 윤기 나는 기름을 입힌 격.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현 지휘자 유리 시모노프의 현란하고 우아한 지휘봉만큼이나 로맨틱했다.

18년 전 한국인 최초로 모스크바필과 협연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로 다시 만났다. 세계적 오케스트라의 내한 무대에서 함량미달의 일부 한국인 협연자가 전체 연주회 수준을 격하시키는 것과는 달리, 양성식이 연출한 차이콥스키의 협주곡은 세월의 깊이만큼 녹록하지 않은 음악성이 묻어나왔다. 놀랍게도 협주곡조차 악보 없이 암보로 지휘한 시모노프의 손끝은 거기에 본고장의 향기를 속속들이 저미고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4번은 역시 호연이었다. 현의 일사불란함과 관의 노도와 같은 폭풍은 4악장에서 작렬했다. ‘피치카토(현을 손으로 퉁기는 주법)’가 지배하는 3악장에서의 리듬감은 춤추듯 율동적인 시모노프의 제스처만큼이나 활달했다.

현재 모스크바의 교향악계는 가히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큼 난립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모스크바필은 과거의 전통을 간직하면서 건재함을 이번 무대에서 알 수 있었다. 러시아와 수교 후 몇몇 국내 기획사들이 질이 낮은 러시아 공연물을 싼값에 소개해와 물의를 빚었다.

그러나 이날 공연장 군데군데 빈자리가 많았던 객석을 보면서 러시아 최고의 연주까지 외면당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을 남겼다. 의정부(21일), 통영(22일), 김해(23일), 오산(24일), 울산(25일)에서 열리는 콘서트는 수준 높은 청중으로 가득 차기를 기대한다.

유혁준 음악칼럼니스트 poetandlov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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