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1년 러 크론시타트 반란 진압

  • 입력 2006년 3월 7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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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로 널리 알려진 크론시타트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 32km에 위치한 코틀린 섬의 작은 도시다.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방어를 위해 요새를 쌓았고 이후 발트함대의 주력기지가 됐다.

크론시타트 수병들은 1905년 부르주아 혁명과 1917년 2월 혁명, 10월 혁명의 선봉에 서서 볼셰비키 정권을 만든 혁명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러시아 내전 막바지에 볼셰비키 정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혔다.

1921년 2월 28일 수병 1만6000여 명은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유선거 보장, 언론 출판의 자유, 정치범 석방, 재산소유권 보장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당시는 폭압적인 ‘전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러시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던 때였다.

볼셰비키로서는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크론시타트의 반란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볼셰비키 정권은 반란을 외국 정보요원과 차르 체제 관료들의 반혁명 책동으로 몰아붙이면서 3월 7일 크론시타트 진압 작전에 적군(赤軍)을 투입했다.

진압의 총지휘자는 레온 트로츠키 육군 원수. 그는 “무조건 항복한 사람한테만 소비에트 공화국의 관용이 있을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한 뒤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진압군 병사들이 처음부터 공격을 거부하는가 하면, 적진까지 전진한 병사들이 곧바로 항복해 버려 장교만 부대로 복귀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최종 진압까지 열흘 이상 걸렸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크론시타트의 수병과 시민 527명이 죽었고 4127명이 다쳤으며 8000여 명이 핀란드로 도망쳤다. 진압 직후 수병 500여 명이 즉결 처형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진압군 측에서도 1만 명의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나왔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르는 동안 공산당은 제10차 당 대회를 열어 자본주의적 개인영업을 대폭 자유화하는 ‘신경제정책(NEP)’을 채택한다. 철저한 계획에 따라 운용되는 전시 공산주의 경제 체제를 끝내는 데 크론시타트 봉기가 결정적이었던 셈이다.

크론시타트를 둘러싼 역사적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이들의 요구는 ‘볼셰비키 반대’가 아니라 ‘더 나은 볼셰비키’였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레닌과 트로츠키의 잔인한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 사건으로 꼽히기도 한다.

트로츠키는 훗날 멕시코 망명생활 중 “크론시타트 봉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맞선 프티부르주아의 무장 반동행위일 뿐이었다”며 유혈 진압에 대해서도 “비극적이지만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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