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 입력 2006년 1월 1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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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유승훈 지음/250쪽·1만2000원·살림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현장에서 14면체의 독특한 주사위가 발견됐다. 사각형 6면, 삼각형이 8면인 이 주사위의 각 면에는 숫자가 아닌 벌칙이 적혀 있었다.

‘술 석 잔 한번에 마시기’, ‘노래 없이 춤추기’, ‘얼굴 간질여도 꼼짝 않기’와 같은 그 벌칙의 내용은 오늘날 술자리에서 펼쳐지는 벌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라 귀족들이 안압지에서 술을 마시며 어떻게 놀았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다. 1902년 서울 주재 이탈리아 대사로 부임했던 카를로 로제티는 ‘꼬레아 꼬레아니’라는 책에서 “도박에 대한 열정은 아마도 모든 한국인이 천부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일 듯하다”라고 썼다.

장터에서 상인과 손님이 물건을 흥정하면서조차 산통에서 대나무로 된 산(算)가지를 뽑아서 결정하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주사위와 산가지는 모든 도박의 기원이다. 주사위를 던지거나 산가지를 뽑아 신의 뜻을 묻는 고대의 제의와 점술에서 도박이 출발했기 때문이다.

음습한 도박이 엄숙하고 경건한 의식에서 출발했다는 역설은 한국 도박의 역사를 다루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민속학을 전공하고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있는 저자는 주부 도박단과 카지노 폐인, 내기 골프가 뉴스에 오르는 오늘날 한국의 도박 근성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사료를 뒤져 한국 도박의 역사를 추적한다.

산가지와 주사위 그리고 고급 말판이 결합한 쌍륙(雙六)과 오늘날 윷놀이의 효시로 추정되는 저포(樗蒲), 스포츠와 도박이 결합한 격구(擊毬), 17세기경 조선에 등장해 오늘날 ‘장땡’과 ‘가보’와 같은 숫자 맞추기의 효시가 된 투전(鬪전), 19세기 말에 등장한 중국 마작의 사촌 격인 골패(骨牌), 그리고 도박을 금지한 갑오개혁의 공백기에 일본에서 건너와 도박판을 평정한 화투(花鬪)까지.

음지에 있던 도박의 역사를 양지로 끌어올린 이 책을 읽노라면 도박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려 무신정권이 들어서기 전후에 사치스러운 격구가 유행했고,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걸어가면서 전국에서 투전판이 벌어지고,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지용이 화투판에서 나라를 판 돈을 모두 날렸다는 이야기가 그런 사례다. 같은 어원의 ‘놀이’와 ‘노름’이 얼마나 현기증 나는 차이를 낳는지는 ‘잃었을 때 떠나라’는 마지막 결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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