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9년 국립극장 설치 결정

  • 입력 2006년 1월 10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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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후 채 2년도 되지 않았던 1950년 4월, 국립극장이 문을 열었다. 도로, 항만, 공장 건설 등 신생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고 격렬한 좌우 대립까지 겪던 혼란기에 국립극장의 개관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정부는 한 해 전 1월 10일 국립극장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에까지 국립극장을 세우기로 하고 부산 보래관, 대구 키네마극장 개축에 착수했다. 주요 대도시마다 ‘슈타츠 오퍼’(국립오페라극장)를 두었던 독일을 모델로 한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회에서의 법 개정으로 국립극장은 청사진과는 달리 서울 중구 태평로 부민관 1곳에서만 유치진을 초대 극장장으로 임명해 개관했다.

국립극장의 개관은 일제강점기에 억눌렸던 표현의 무대를 되찾은 무대예술인에게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개관 공연이었던 ‘원술랑’(유치진 작, 허석 연출)은 1주일간 5만여 명이 관람했다. 두 번째 공연인 ‘뇌우’(조우 작, 유치진 연출)는 1주일 공연에 이어 관객의 요청으로 앙코르 공연됐고 무려 7만5000명이 관람했다.

“이 연극을 보지 않고는 문화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지식인층의 호응이 대단했다.”(배우 고 김동원 씨의 회고)

당시 서울 인구가 40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원술랑’은 서울 시민 8명 중 1명, ‘뇌우’는 거의 5명 중 1명이 관람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립극장은 개관 2개월 만에 6·25전쟁의 발발로 기능 정지 상태가 됐다. 전쟁 중에는 대구의 문화극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환도 후에는 명동 시공관을 극장 건물로 쓰다가 지금의 장충동으로 다시 이사했다. 아쉬운 점은 1973년 국립극장이 장충동으로 이전함으로써 ‘예술의 메카’로서의 명동시대 또한 막을 내렸다는 것.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명동은 문학 미술 연극 등 장르를 막론하고 예술가들의 발길이 집중되던 곳이었다.

1975년 이후 금융회사 사옥으로 쓰이던 옛 명동 국립극장은 2007년 말 명동예술극장으로 다시 태어난다. 명동에 문화가 꽃피기를 바라는 시민들의 염원에 따라 522석 규모의 연극 전용관으로 재개관하는 것. 16일 역사적인 리모델링 공사가 시작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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