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허전한 세밑… 돌아앉아 거울을 보자

  • 입력 2005년 12월 26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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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마음이 허전한가. ‘큰 바위 얼굴’이 사라져서인가. 인간이 사는 데는 사실만으로 부족하고 신화도 필요하다. 황우석 교수는 불치병 환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신화적 존재였다. 그런데 ‘불 꺼진 창’처럼 그 신화가 깨진 것이다. 지금으로선 황 교수 한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이 대세다. 하지만 손가락 끝을 보기보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황 교수에겐 과욕이 있었다. 언제나 앞서 가려는 일등주의, 끝없이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것이었을 게다. 그의 과속행위는 한국 근대화를 추동했던 ‘빨리빨리’ 정신의 재판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심전심으로 요구하지 않았던들, 그가 ‘오버’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이제야말로 심호흡을 가다듬는 ‘천천히 정신’이 필요한 때로, 윤리의식은 물론 절차적 엄정성,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작동했어야 했는데…. 이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처럼 거대한 돌을 산 정상 위에 올려놓자마자 제 무게를 못 이겨 아래로 굴러 내려오는 재앙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영웅은 죽었다. 그러나 ‘죽은 영웅의 사회’는 안 된다. 영웅의 사회는 존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도덕적 펀더멘털’을 정비해야 한다. 정직함과 신뢰, 반성성, 진정성과 같은 것들이 펀더멘털이다. 이 기반 위에 창의성과 탁월성이 세워졌을 때 비로소 기념비적 업적이 빛을 낼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남의 탓’에 열중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며 자성하는 태도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가.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도 거울은 보았으나 남을 의식하는 거울이었다. “누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가”에만 집착하고 있었던 왕비는 자신의 모습을 허심탄회하게 돌아볼 수 없었다.

이번 사태를 놓고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볼까 하며 실추된 한국의 위상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반성하며 그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는 태도다. 우리가 눈물을 흘린다면 남이 한국인을 어떻게 볼까 하는 체면의식보다는 우리 모두 공범이라는 죄책감 때문이어야 한다. 지금 이 시각에도 황 교수를 성원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들로 갈리고 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건 비난하건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빨리빨리’의 정신, 물불 안 가리고 앞서 가겠다는 조급증, 결과만 내면 된다는 결과주의가 한국인의 원죄임을 인정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원죄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마음 아파하며 참회할 때 비로소 ‘껍데기’는 가고 진정한 ‘큰 바위 얼굴’들이 출현할 것이다.

델릴라의 유혹에 빠진 삼손은 결국 머리를 깎여 힘을 잃었다. 영락없이 머리 깎인 삼손이 된 황 교수도 얼마 후에는 눈까지 뽑힐는지 모른다. 그를 부추겼던 우리도 그의 신세와 다를 바 없다. 구원의 길은 있는가. 삼손이 눈이 뽑혀 죽게 되었을 때 참회함으로써 괴력을 되찾았다면,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참회할 때 새로운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중간발표의 날은 한국인 모두에게 ‘국치일’이 아니라 ‘참회의 날’일 뿐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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