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서 떠돌던 원혼들 고향에 편히 모셔야죠”

  • 입력 2005년 11월 26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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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의 유골이 일본에 있다는 말이 정말입니까?”

똑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퍼붓다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확실하다”는 답변을 거듭 듣고 난 감우택(73) 씨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감 씨는 일본이 강제 동원한 맏형 감우천(당시 24세) 씨의 소식을 61년 만에야 전해 들었다. 1944년 우천 씨가 끌려갔을 때 우택 씨는 12세였다.

우택 씨는 “마을 어귀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집결지로 가면서 슬픈 눈으로 가족들을 돌아보던 형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우천 씨는 그해 9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숨졌다.

우천 씨가 일본군에 끌려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형 우중 씨마저 보국대로 징집됐다가 전쟁터에서 병을 얻어 숨졌다고 우택 씨는 전했다. 두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감 씨의 어머니는 광복 직후 숨을 거뒀다.

8형제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우택 씨는 “그 긴 시간 고국을 그리워하며 타지를 떠돌았을 형님의 원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민다”며 “죽지 않고 살아서 형님의 유골이라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쿄(東京) 시 유텐지(祐天寺)에 보관된 남한 출신 조선인 유골 705위(位) 가운데 우택 씨처럼 유족이 확인된 유골은 모두 138위다.

1974년 이후 이처럼 대규모로 조선인 유골의 생존 가족이 확인된 적은 없다. 유골의 주인공들은 모두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됐다가 불귀의 객이 된 조선의 청년들이다.

60여 년 동안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애를 태웠던 유족들은 뒤늦게나마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감격스러워했다.

1945년 전투에 참가했다 병을 얻어 숨진 이채우(징병 당시 19세) 씨의 아들 완익(60) 씨는 “그동안 백방으로 아버지의 소식을 알아봤지만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며 “40년 전부터 가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 왔는데 아버지 유골을 찾게 돼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1944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만배(징병 당시 22세) 씨의 딸 종순(62) 씨는 “일본이 유골 반환에 적극적이었다면 예전에 형님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의 태도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김 씨는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피해자들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해 줄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처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유텐지(祐天寺):

1718년에 세워진 일본 도쿄(東京) 시 메구로(目黑) 구에 있는 사찰. 종전 직후인 1945년 8월 조선인 2000여 명(일본에선 500명이라고 주장)이 탄 여객선 우키시마호(號)가 한국으로 가다 폭격을 맞아 침몰하자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 사고 희생자 유골의 안치를 이 사찰에 의뢰했다. 유텐지에는 한국 정부에 이미 송환된 유골 1193구 이외에 1136구가 더 안치돼 있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단체는 1989년부터 매년 8월 이 사찰에서 조선인 전쟁희생자 추도회를 열고 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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