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 21년만의 내한공연… 청중들 기립박수로 화답

  • 입력 2005년 11월 8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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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처럼 밀려와 듣는 이를 흠뻑 적시지만 너무나 투명해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천의무봉의 소리…. 7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21년 만에 내한공연을 펼친 ‘클래식계의 황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그들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2시간 10분의 연주로 알려주었다. 마지막 곡 ‘영웅’이 끝나자 청중들은 “브라보”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수갈채에 다섯 번이나 무대로 불려 나온 베를린 필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은 “한국에서 다시 연주하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행복은 객석에도 넘쳤다.》

● 최고가 엮어 내는 화음

공연 후 음악평론가들과 애호가들은 입을 모아 “베를린 필은 지금까지 한국을 방문한 어떤 세계적인 연주단체와도 다르다는 것을 오늘의 연주 하나로 보여 주었다”고 말했다.

클래식 애호가인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단원 하나하나의 역량이 두드러지는 연주였다”며 “특히 오보에의 알브레히트 마이어, 플루트의 에마누엘 파후드 같은 스타 연주자나 새로 영입된 일본인 비올리스트 시미즈 나오코 등 젊은 여성 단원들의 테크닉이 이 악단의 전통에 신선한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고 말했다. 음악평론가 유정우 씨는 “두 번째 곡이었던 라벨의 ‘어미거위’에서 베를린 필 특유의 음색이 잘 살아났다”면서 “특히 마지막 크레셴도 부분에서는 수학처럼 정확한 음의 증폭이 빛났다”고 평했다.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베를린 필 리허설. 박영대 기자

연주회 때마다 공을 단원들에게 돌리는 래틀 경은 이날 공연에서도 1부가 끝나자 오케스트라 안으로 걸어 들어가 하프 주자와 목관악기 주자들을 차례로 일으켜 세워 관객의 박수에 답하게 했다.

이날 특히 클래식 애호가들이 주목했던 것은 마지막 곡인 ‘영웅’. 카라얀 시대에는 관악을 원전에 비해 2, 3배 확대 편성했던 데 비해 래틀 경은 베토벤이 작곡할 당시의 편성대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음악평론가들은 “원전대로의 인원으로도 카라얀 시대의 금속성에 가까운 정밀함을 내는 베를린 필에 놀랐다”고 말했다.

● 기립 박수를 멈추지 않은 김수환 추기경

“도대체 ‘영웅’ 같은 곡 다음에 어떤 곡을 더 연주할 수 있는 거죠?”

관객들의 연호에 네 번이나 무대로 걸어 나온 끝에 시벨리우스의 ‘두루미의 정경’을 앙코르 곡으로 지휘한 래틀 경은 이런 조크로 객석의 웃음을 자아냈다. 래틀 경이 앙코르 연주에 들어갈 때까지 2층 VIP석의 김수환(83) 추기경은 내내 선 채로 박수를 쳤다. 추기경은 “오랜만에 너무도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공연에는 김 추기경을 비롯해 이해찬 국무총리, 윤영철 헌법재판소장, 오거돈 해양수산부 장관, 천정배 법무부 장관, 한승헌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 닝푸쿠이(寧賦魁) 주한 중국대사,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 조영택 국무조정실장, 조기숙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노무현 대통령의 아들 건호 씨 부부 등 사회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예술의 전당 로비에 마련된 대형 모니터 앞에는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100여 명의 클래식 팬이 몰려 전체 공연을 지켜보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영혼 울린 ‘연륜과 패기의 앙상블’▼

나는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니와 같이 늙어 왔다는 얘기를 가끔 한다. 카라얀이 이 명문 악단의 종신 지휘자로 임명된 5, 6년 후부터 나는 베를린 필 가까이에서 그리고 그 음향 세계 안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다.

1963년 “음악을 중심으로!”라는 이념하에 연주무대를 객석의 앞이 아니라 가운데에 마련한 한스 샤룬의 신축 연주회관이 마침내 마련됐을 때도 나는 개관기념 첫 공연에 참석했었다. 당시 카라얀의 나이가 55세. 그때 이미 빈 필하모니의 지휘대 앞엔 머리가 허옇거나 벗어진 수석 주자들이 자리 잡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카라얀이 오디션을 통해서 물갈이한 베를린 필의 경우엔 머리숱이 넘실거리는 신예들이 앞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토마스 브란디스, 레온 슈피러 등 콘서트마스터, 오토마 보로비츠키, 에버하르트 핀케 등 제1 솔로 첼리스트, 그 밖에도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친 플루트의 카를하인츠 쵤러, 클라리넷의 카를 라이스터 등 당시 모두 30대의 젊은이였다. 베를린 필의 힘과 생기의 원천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베를린을 떠나온 뒤 10여 년 만에 나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두 차례 구경 가서 다리를 저는 카라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와 함께 베를린 필의 앞자리에 앉은 슈피러, 브란디스, 보로비츠키 등이 모두 머리가 허연 노장이 된 것을 보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베를린 필도 나와 함께 늙어 가는구나 하면서….

그러나 오늘 저녁 내 앞에서 연주하는 베를린 필은 전혀 다른 ‘새로운’ 베를린 필이다. 나와 같이 늙어 가는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젊은, 다시 젊어진 오케스트라이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맡으면서 물갈이했듯이 젊은 상임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세대교체를 시킨 새로운 엘리트들의 악단이다. 카라얀 시절엔 한 명의 여성도 없었던 ‘금녀의 악단’에 10명이 넘는 여성 주자가 자리 잡은 것도 새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향은 묵은 간장독의 위쪽에 새 간장을 부은 듯 웅숭깊은 베를린 필의 맛 그대로이다. 탄력성이 넘치는 삽상한 현의 음향, 투명한 관의 색조, 강요되지 않은 오케스트라의 ‘디서플린’과 잘 통제된 스윙. 그래! 바로 이게 베를린 필의 소리다. 나는 특히 전반부의 베를리오즈와 라벨에 압도되고 앙코르 곡으로 선물해 준 시벨리우스의 소품에 매혹돼 버렸다. 베토벤 3번이 잘 들어오지 않은 것은 아직도 내 귀에 남은 카라얀, 뵘, 클렘페러의 잔향 때문일까?

오랜 교감으로 최소한의 제스처만으로 충분했던 말년의 과묵한 지휘와는 달리 카라얀도 50대의 나이에는 지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던 웅변의 지휘자였다. 사이먼 래틀의 지휘에서 그런 웅변을 보는 듯했다. 어떻든 서울에서 카라얀 최말년의 베를린 필과 사이먼 래틀 초창기의 베를린 필을 둘 다 듣게 된 건 음악 팬에겐 ‘복’이 아닐 수 없다.

최정호 객원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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